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길을 걷다 보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길 위를 서성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길 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입니다. 길을 걸으며 바라보고 만지고 깨닫는 흐름 속에서 삶의 신선하고 향기로운 형상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풀 한 포기조차 구경하기 힘든 공간 안에서 또는 매일 되풀이하는 단조로운 시간의 굴레 속에서 일탈하려는 몸부림은 행렬을 이룹니다.  주말이나 며칠 동안의 휴가가 이어지면 많은 이들이 짐을 싸 들고 산으로 들로 바다로 놀이공원으로 향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들끼리 어울려 구경을 다니며 음식을 사 먹거나 직접 요리해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이들 중에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장면은 간편한 배낭을 둘러메고 길을 걸으며 풍경을 유희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걷는 것이 좋아 길을 쫓습니다. 파도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길과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숲속의 자그마한 꽃을 만났을 때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긴장하거나 안정을 취합니다. 무언(無言)의 자연과 마주하여 교감하는 순간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들여다보기 좋은 시간을 경험합니다. 작지만 고요하고 예쁜 생명 앞에서 자아의 존재가 성스럽고 고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길을 걷다 보면 생뚱맞은 소리 같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곤충들이 분비하는 페르몬이라는 물질을 함유하고 있음을 봅니다. 산행을 하거나 특정한 이름의 길 이를테면 지리산둘레길, 올레길, 바래길, 남파랑길, 외씨버선길 등을 걷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게 리본이나 방향 표식입니다. 들머리나 헷갈리기 쉬운 갈림길은 물론이고 평범하게 이어지는 외길에도 어김없이 이 같은 이정표를 만납니다. 행여 길을 놓칠세라 염려한 일종의 경로 페로몬입니다. 

외국의 산이나 길을 가면 나무 말뚝 이정표나 화살표 따위의 작은 표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무자비하다 할 정도로 여러 수십 개의 리본을 다는 과시용은 찾기가 힘듭니다. 미관을 해치는 문제도 있지만 자연을 ‘순수한 상태 있는 그대로’ 두려는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과례비례(過禮非禮)의 수준을 넘어선 단계입니다. 

도(道)란 ‘길’을 의미합니다. 또한 ‘말하다, 가다, 다니다’의 뜻을 지녔습니다. ‘지켜야 할 도리나 깊이 깨달은 지경’을 가리킵니다. 무릇 길을 걷는다 함은 생의 진리를 터득하는 일일 것입니다. 새삼 논어의 구절을 되뇌어 봅니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많은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방향을 삶의 내용이라 풀이합니다. 삶의 내용이란 삶의 가치요 즐거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바람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숲속의 자그마한 꽃은 누가 찾아주지 않아도 결코 제 갈 길을 잃지 않습니다. 이렇듯 내 몸과 내 마음에 갇혔던 삶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나는 다시 길을 걷습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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