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사천] 아노말리

「아노말리」에르베 르 텔리에 /민음사/ 2022
「아노말리」에르베 르 텔리에 /민음사/ 2022

[뉴스사천=박금미 삼천포도서관 사서] 나와 똑같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분신과 나는 서로 우호적일까 아니면 적대적일까. 비밀을 공유하거나 나눌 수 있을까? 국제적 실험 문학 집단 울리포의 회원인 저자는 이런 극적인 소재에 매력적인 구성을 더해 단숨에 평단을 사로잡았다. 프랑스어로 이상, 변칙, 분기를 뜻하는 『아노말리』는 2020년 공쿠르상을 거머쥔다. 

2021년 3월 10일, 파리-뉴욕행 에어프랑스 여객기가 예고에 없던 난기류를 만나 위기를 겪은 후 착륙한다. 그리고 석 달 뒤 6월 24일, 동일한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 동일한 착륙 지점을 향해 간다.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기장과 승무원, 승객들을 싣고서.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여객기를 뉴저지 공군기지로 비상 착륙시키고 격납고에 243명의 승객을 격리한다. 극비리에 과학자들을 소집하여 원인 규명에 나서지만 현존하는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저자는 이 현상이 미지의 존재가 설계한 시뮬레이션이라는 파격적인 가설을 제시한다. ‘6월’은 ‘3월’의 그들과 같은 기억, 같은 가족을 가진 똑같은 사람이다. 이중생활을 하는 청부살인업자,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기장의 삶을 차례차례 다룬다. 이외에도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하는 뮤지션, 사랑의 시효가 임박한 연인 등 주요 인물들을 다각도에서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그들은 자신의 분신을 직면한 후 생사를 가르거나, 새 출발을 시작하거나, 사랑하는 이를 떠나야 하는 등 처한 상황만큼 다양한 삶의 기로에 놓인다. 인물들의 삶은 불확실하다. 책을 덮은 후에도 의문부호가 따라온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실인지, 삶은 한낱 꿈이 아닌지. 감상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책은 문제의 비행이 있기 전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다룬 1부를 시작으로 사회 각계에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2부, 마침내 자신의 분신과 대면하는 3부로 구성되어있다. 각 부를 연결하는 치밀함, 이질적인 분야를 하나의 소설에 녹여내는 저자의 지성, 실험성을 더하는 마지막 문단까지 묵직한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빈틈없이 짜인 SF 미스터리 영화 한 편이 자동 재생되는 것 같은 고도의 문학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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