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구룡저수지~능화마을

잎을 떨군 겨울 능화숲이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래도 수백 년을 마을 주민과 함께해 온 숲이다.
잎을 떨군 겨울 능화숲이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래도 수백 년을 마을 주민과 함께해 온 숲이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우천숲 끝에 서서 구룡저수지를 바라본다. 푸르게 넘실거리는 물결. 저 건너 못둑은 어릴 적 소풍 다니던 장소다. 구룡저수지는 죽천천에 젖 망울처럼 매달려 있다. 그리곤 화전과 죽천을 이어 초전의 들판을 적신다. 우리 집 논도 오래도록 이 생명수에 의존해 왔다. 그러고 보니 구룡저수지는 어린 나를 키워낸 젖줄이었구나.

구룡저수지
구룡저수지

우천 숲 아래 개울에 백로 한 마리, 왜가리 한 마리가 앉았다가 자리를 뜬다. 야생의 생명이라 사람 냄새를 싫어하나 보다. 여름 내내 풍족했던 개울은 가늘게 야위어 거울처럼 명징한 물웅덩이를 내놓았다. 여기 흰뺨검둥오리 다섯 마리 앉아있다. 서로 눈길이 딱 마주쳤는데 어찌할 줄을 모른다.

흰뺨검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두려운 존재가 갑자기 심리적 거리 안에 나타난 거니까.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굳은 듯 경계를 한다. 한참 지켜보다가 슬쩍 카메라를 들이밀고 자세가 좋은 녀석을 골라 증명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돌아서는데 퍼드덕 날아 가버린다. 다가서려는 자와 멀어지려는 자 사이에는 애증의 골이 깊다.

개서어나무 둥치
개서어나무 둥치

지척에 있는 능화숲에 들었다. 한여름 피서객을 받은 뒷모습이 어수선하다. 그 새로 듬성듬성 굵직한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여러 그루 개서어나무는 상당한 연륜이 느껴진다. 여느 마을숲에서 보기 어려운 정도의 크기다. 구불구불 힘살이 느껴지는 둥치를 바라본다. 저 속에는 세월의 그림자들이 켜켜이 쌓여 있겠지. 마을숲으로 불려온 생명 유산의 변천. 지금은 어떤 그림자를 제 속에 새기고 있을까? 무질서를 확대재생산 해온 생명의 인류. 농경문화의 중심을 당당하게 지켜오던 우리네 마을숲이 여가문화의 도구로만 전락한 듯하여 씁쓸하다.

능화마을을 지나는데 오래된 돌담 위 덩굴로 뒤덮인 푼지나무가 보인다. 세 갈래 열매껍질이 벌어져 붉디붉은 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햇살을 받은 얼굴엔 반짝반짝 빛이 난다. 돋보이는 한겨울의 화장은 새들을 위한 유혹이겠지? 푼지나무 열매는 노박덩굴 열매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닮았다. 서로 다른 점은 푼지나무 덩굴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또 노박덩굴은 산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푼지나무를 집순이라 한다면 노박덩굴은 차돌이라 할 수 있을까?

푼지나무 열매
푼지나무 열매

마을 뒤 산기슭에 길가를 향해 고개를 내민 쥐똥나무 한 그루. 까만 열매가 흐드러지게 늘어졌다. 어떤 불안 심리가 이토록 많은 열매를 맺게 하였을까? 이어 나타난 능화저수지.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만 호수다. 오후 햇살 쏟아지는 잔잔한 수면에 논병아리 세 마리 여유롭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는 마음에도 여유가 스며든다. 길 위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

쥐똥나무 열매
쥐똥나무 열매
개산초나무
개산초나무

밭둑에는 제법 크고 튼튼한 개산초나무 한 그루 있다. 밭 주인이 심은 것 같기도 하다. 푸른 잎을 잔뜩 매달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서 보니 잎의 앞뒤로 무서운 가시가 성성하다. 식물이 가시를 만드는 것은 뜯어 먹히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수단이라 한다. 힘이 없고 약한 것이 살아남을 생존방식인 셈이지. 가시를 만들기도 하지만, 제 속에 독을 지니기도 하고, 순순히 뜯어먹히면서 훨씬 더 많은 잎을 생산하기도 한다. 잎을 먹는 동물의 천적과 공생관계를 맺기도 한다. 식물이 잎을 지키는 방법은 이처럼 다양하다. 어떤 방법을 택하여 진화해 왔는지에 따라 개성과 얼굴이 달라진다. 

댕댕이덩굴 열매
댕댕이덩굴 열매

우리도 환갑이 지나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난다지 않는가! 한 번 끼워진 단추는 다시 채우기 어렵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산자락 가장자리에 댕댕이덩굴 까만 열매가 쪼글쪼글 말라붙어 있다. 포동포동 빛나던 그 얼굴도 시간을 비껴가진 못하네. 해는 서산에 길게 걸렸는데 아직 갈 길은 멀구나!

식물 문화 연구가이자 산림 치유 지도사인 최재길 시민기자는 사남면 죽천 사람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랫동안 머물다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천의 곳곳을 걸으며 만나는 풀과 나무, 숲 따위를 이곳 ‘야생야화(野生野話)’에서 소개한다. 때로는 그의 추억이나 재미난 이야기도 만날 수 있다.    -‘야생야화(野生野話)’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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