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사천=조평자 사진작가] 세상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는 가을이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친구가 아주 오랜만에 한국에 왔다, 선물까지 들고서.

향수였다. ‘샤넬 N°5’. 요즘 말로 치면 대용량이었다. 사각의 향수병, 은은한 병 속의 골드 빛 액체, 두말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이국의 꽃향기. 갖고 싶었던 제품이었기에 무엇보다 고맙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스튜디오 메이크업실 거울 앞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한국을 떠나기 전 자주 갔던 선구동 41번가에 있는 <황금마차> 아구찜 집에서 꾸덕하게 말린 아구를 주문해서 맵도록 먹었다.

매일 매일 한 방울의 향수로 하루를 열던 어느 날, 해 질 무렵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친 여학생 셋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왔다. 메이크업실에서 앞머리도 손질하고 입술에 립밤도 바르면서 소곤거리는 모습이 너무 수수하고 보기에 좋았다. 웃음기 많은 아이들이 서로 먼저 찍으라고 순서를 미루기도 하고 웃음을 참으며 재미있게 사진을 찍었다. 보정 작업을 마치고 마음에 드는 증명사진을 곧장 찾아갔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향수를 뿌리려고 무심코 메이크업실로 들어서니 감쪽같이 향수가 사라지고 없었다. 일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아, 어제 그…’ 혼잣말을 하는 내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출국하기 전에 가게로 한 번 더 놀러 올 친구가 사라진 향수 이야기를 꺼내면 어떡하지? 마음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좋았던 사람들, 그리웠던 음식들, 잊을 수 없는 장소를 원 없이 만끽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동안 향수 사건으로 우울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아이들도 얼마나 갖고 싶었을까. 내가 그 향수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너무 갖고 싶었어!’

향수 한 병이 나에겐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이고, 친구에겐 마음으로 건넨 사랑이었다. 그 아이들에겐 두고두고 후회할 충동의 순간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는 말해주고 싶다. “얘들아! 괜찮아.”

 

글쓴이 소개: 조평자 작가는 40년 가까이 사진관을 운영하며 사천 사람들의 얼굴을 기록해 온 이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사진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창 = 나의 사진 이야기>에 풀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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