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용현 구월마을

용현면 구월마을 들판에서 농부가 냉이를 캐고 있다. 냉이를 비롯한 여러 들풀은 겨우내 몸을 납작 엎드렸다가 누구보다 봄을 일찍 맞는다.
용현면 구월마을 들판에서 농부가 냉이를 캐고 있다. 냉이를 비롯한 여러 들풀은 겨우내 몸을 납작 엎드렸다가 누구보다 봄을 일찍 맞는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우수도 지나고 땅이 촉촉하다. 봄의 생기도 꼼지락거린다. 석계 저수지를 보고 오르다 들판에서 뭔가 캐고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푸른 밭에서 냉이를 캐는 중이시다. 한창 물이 오른 냉이를 바라본다. 향긋하면서도 쿰쿰한 땅 냄새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가녀리게 하얀 꽃도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냉이
냉이
냉이밭
냉이밭

노부부 가까이 다가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어 본다. 동네 이름을 물으니 용현면 구월리라 한다. 구월마을은 높은 언덕 위에 분지처럼 야트막한 산이 감싸고 있다. 온종일 볕이 들어와 따뜻한 온기가 머문다.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조용하고 평온한 산골 마을 풍경이다. 그래서 바다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자연환경은 냉이를 키우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구월마을 냉이는 동네 특산물이다. 비닐하우스가 아닌 노지에서 비바람 겨울 추위를 견디며 자라 더욱 좋다.

노부부가 냉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먼 동네 들판을 쏘다니며 캐다가 팔았다. 나중에는 빈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수입이 쏠쏠하니 차츰 냉이 농사짓는 농가도 늘어났다. 늦가을부터 캐기 시작하면 이듬해 봄까지 수확한다. 한 사람 하루 수입이 쌀 한 가마보다 훨씬 낫다니. 노부부의 목소리에 뿌듯한 자신감이 넘친다.

광대나물
광대나물

내려오면서 밭둑가 식물을 눈여겨본다. 양지바른 밭둑가에는 광대나물이 발갛게 피어나 반가운 인사를 한다. 광대나물의 꽃을 들여다보면 화려하면서도 수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꽃 속에 어릿광대의 ‘눈물웃음’이 감추어져 있어서일까? 예전에 어머니가 ‘이게 망태재이’라고 알려준 적이 있다. 배고픈 젊은 시절 나물로 먹었단다. 밭 가에 워낙 흔한 식물이니 망태 속에 항상 들어 있던 풀이라 이런 이름을 붙여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보아하니 서민들의 생활에서 나온 이름인가 보다.

서둘러 먹이를 구하러 나온 꿀벌이 꽃에 매달려 있다. 꽃은 사정없이 아래로 늘어진다. 이 작은 꽃이 벌을 부르는 현장을 보고도 믿기 어렵구나! 좌우대칭 입술 모양의 대롱꽃에는 주로 꿀벌이 찾아온단다. 꿀을 깊이 숨겨두고 원하는 손님만 가려서 받는다는 거지. 자물통에 맞는 열쇠처럼. 광대나물은 더 나은 대(代)를 위한 준비를 야무지게 해두었구나! 식물의 형태는 곤충과의 관계 속에서 자꾸만 진화한다. 공진화 관계는 서로 유리한 대가를 치를 때 커진다.

달맞이꽃
달맞이꽃
지칭개
지칭개

달맞이꽃, 꽃다지, 지칭개, 뽀리뱅이, 개망초, 꽃마리, 그리고 냉이! 추운 겨울을 이기고 봄의 기지개를 펼치는 로제트 식물들이다. 텃밭에는 지난가을 수확하지 않아 잔뜩 웅크린 배추도 로제트를 이루고 있다. 월동을 위한 최선의 형태란 걸 웅변하듯이.

작고 힘없는 들풀은 본디 씨앗의 형태로 겨울나기를 해왔다. 하지만 오랜 습관에 순응하기를 거부한 친구들이 있으니, 바로 로제트 식물이다. 이들은 가을에 싹이 터서 겨울을 이기는 방법을 찾았다. 잎을 방석처럼 둥글게 내밀고 땅바닥에 바싹 엎드리는 거지. 잎은 서로 겹치지 않아 햇빛을 골고루 받고 바람은 피할 수 있다. 해가 뜨면 지열(地熱)로 추위를 이기고 수분 증발도 막을 수 있다. 볼품없는 들풀이 설계한 월동준비가 놀랍도록 지혜롭지 않은가!

배추
배추

로제트 식물은 주로 한해살이거나 두해살이다. 들풀이 자라는 생존환경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빈터를 차지하려는 다툼도 심하다. 햇빛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로제트는 다른 들풀이 잠자리에 드는 한겨울 비어있는 공간을 선점한다. 빨리 시작하는 만큼 봄을 빨리 열 수 있다. 100m 달리기를 하는데 10m쯤 앞서 출발하는 것이지. 그 결과 로제트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생존경쟁의 새로운 아이콘이 되었다. 아무도 가 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여는 일이 어디 그리 쉬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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