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정동 대산마을~배방사지

정동면 대산마을 골짜기에 오르니 현종의 이야기 품은 배방사 터가 있다. 외딴집 늙은 감나무에 햇살이 내려 앉았다.
정동면 대산마을 골짜기에 오르니 현종의 이야기 품은 배방사 터가 있다. 외딴집 늙은 감나무에 햇살이 내려 앉았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대산마을을 지나치다 문득 골짜기로 올라가 배방사 터를 찾았다. 요양하러 들어왔다는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신다. 둘레둘레 살피면서 찾아가니 배방사 터에는 정자 하나 덩그러니 앉아있다. 이곳이 고려 현종이 어린 시절 아버지 곁에서 보낸 사적지라 한다. 우리 지역의 주요한 역사적 사실에 여태 눈 감고 있었다니.

대산마을
대산마을

집으로 돌아와 고려 현종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보았다. 야생야화, 무계획의 계획이 횡재를 맞았구나! 현종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영웅의 서사시다. 사연이 길면 지루하니 간단히 정리를 해보자.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은 과부가 된 선대의 왕후와 사통해서 아이를 낳았다.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많았고 성(性)적으로 자유로웠던 시대라고 하지만, 왕실이 발칵 뒤집힐 만한 불륜 스캔들이었다. 이 때문에 왕욱은 개성에서 사남면 능화로 유배를 당했다. 성종(6대)은 아이를 가엾게 여겨 정동면 배방사에 내려보냈다. 아버지 근처로 보내준 것이다. 나중에 이 아이가 왕위에 오르니 고려 8대 임금 현종이시다(부자상봉길은 뒤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다).

현종은 불안정한 왕실과 동북아 국제정세를 안정시키면서 고려의 태평성대를 마련한 왕이다. 강력한 두 세력,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자주외교로 동북아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 이면에는 현종의 용맹함과 지혜와 성덕이 녹아 있다. 이때부터 100년 동안 고려는 외세에 시달리지 않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런 결실이 있기까지 형극의 날들이 어린 현종 왕순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배방사터
배방사터

목종(7대)의 어머니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면서 자신의 혼외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때 걸림돌이 되는 왕순을 없애려 음식에 독을 타고 자객을 보내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어 강조라는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천추태후와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앉혔다. 허수아비였던 셈이지. 현종은 왕이 되던 해 거란의 2차 침입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때 온갖 천대와 죽을 고비를 또 넘겼다. 지방 호족들의 힘이 드셀 때였으니까.

피난에서 돌아온 현종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포용의 힘으로 중앙집권과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상은 후하게 주고 벌은 최소한으로 주는 대인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이 겪은 위기와 고난을 넘어선 사회통합의 행보였지. 국가에 공을 세운 가족이나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귀주대첩의 강감찬 장군 같은 탁월한 인재를 파격적으로 뽑아 썼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지. 임진왜란의 유성룡과 이순신 장군처럼.

사회적 관념이 허락할 수 없는 태생적 배경을 지닌 불운의 왕,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인류 역사에 큰 발걸음을 남긴 왕, 그 사이에는 구절양장의 계곡이 깊다. 사회적 파격이 허락되지 않으면 이런 영웅이 탄생할 수 있을까? 하늘이 큰 인물을 내는 뜻을 어찌 알 것인가?! 한 나라의 왕을 뽑는 우리의 관념과 집단행동을 들여다보게 한다.

탱자나무
탱자나무

성군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여기 밋밋한 야산에 녹아 있었다니! 천하를 호령할 인물이 깃든 형극의 터! 배방사지. 한 무리 탱자나무 가시 성성한데 지난가을의 탱자 하나 덩그러니 매달려 있구나. 외딴집 길모퉁이 늙은 감나무는 오후 햇살에 굽은 속살을 훤히 드러내었고.

수리
수리
매화
매화

산모롱이 지나니 산골마을에도 온통 봄꽃 소식이로구나! 실바람에 코끝을 스치는 매화향이 격정적이지도, 감미롭지도 않다. 심연의 바다에 출렁이는 은은함이랄까. 그 깊이와 묘한 매력에 빠진다. 옛 선비들이 매화를 군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뜻을 알 것 같다. 무심결에 하늘 한 번 올려다본다. 하늘의 제왕인 수리 한 마리 유유히 날고 있다. 저 건너 나목 숲에 빛살의 음영이 대비를 이루니,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것이 한순간에 달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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