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과 고추장, 4,300m 고지에서 만나니 더 반갑구나
그런데 쉬어도 쉬어도 가시지 않는 피로감, 이거 뭐지?
안데스 등반, 여기서 끝?…헬기 타고 병원행 신세 되다

[좌충우돌 ‘안데스’ 산행기] ⑥ 헬기 타고 병원으로

베이스캠프. 적절한 금액을 내면 숙박은 물론 식사도 된다. 그래서 늘 분주하다.
베이스캠프. 적절한 금액을 내면 숙박은 물론 식사도 된다. 그래서 늘 분주하다.

[뉴스사천=박용식 경상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베이스캠프는 분주하다. 등반객을 맞이하고 그들을 위한 식사 준비도 한창이다. 적절한 금액을 내면 숙박은 물론 식사도 된다. 4,300m 고지에서 간이 호텔을 운영하는 것과 같다. 정상 등반이 아니라 베이스캠프까지만 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행사에서 제공하는 텐트와 그 직원들이 만들어 내는 음식을 먹는다. 몸이 피곤하니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짝 부럽기도 하다.

척 보니 일본에서 온 팀이 있다. 먼저 말을 걸어온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서툰 한국어로 자기 아버지가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말은 잘 못 한다”며 미안해하는 표정이 순수해 보인다. 주머니에 사탕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주었을 텐데, 그냥 보낸 게 아쉽다.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멘도사에서 구입한 건포도를 한 움큼 먹어본다. 아, 모처럼 맛보는 달큼함에 행복하다.
멘도사에서 구입한 건포도를 한 움큼 먹어본다. 아, 모처럼 맛보는 달큼함에 행복하다.

와이파이 연결은 내일 하기로 하고 내 텐트로 간다. 노새 등에 실려 온 장비와 식량을 보니 배낭에 넣었던 기억이 새롭다. 연구실 책상에서 아콩카과를 꿈꾸며 포장했던 간식들이 고스란히 이곳까지 왔다. 한글이 적힌 라면 봉지도 반갑다. 텐트까지 무사히 와 줘서 고맙다. 멘도사에서 구입한 건포도를 한 움큼 먹어본다. 아, 모처럼 맛보는 달큼함에 행복하다.

물을 뜨러 가야 하는데, 텐트가 워낙 작아서 드나들기가 쉽지 않다. 등산화 신기도 안 쉽다. 등산화를 신지 않은 채로 해결하기로 한다. 어제처럼 텐트에 쌓인 눈과 주변의 눈을 모아서 물을 만든다. 몇 종의 라면 중 제일 당기는 거 하나 골라서 저녁을 차린다. 라면이 끓기 시작하자 아, 고향의 향과 맛이 텐트에 퍼진다. 반찬은 없지만, 치약 통 같이 생긴 튜브에서 고추장을 한번 짜내니 더 이상의 진수성찬은 필요 없다. 멘도사에서 사 온 차 한 잔에 고향 생각도 잊을 정도다.

텐트에 쌓인 눈과 주변의 눈을 모아서 물을 만든다.
텐트에 쌓인 눈과 주변의 눈을 모아서 물을 만든다.
어렵게 재회한 라면이 반갑다.
어렵게 재회한 라면이 반갑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밤이 되자 바람이 세다. 텐트 안으로 찬 바람이 들어오지만, 침낭에 의지해서 밤을 보낸다. 바람 소리 들으면서 몇 번을 뒤척였는지 모르겠다. 바로 누웠다가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또 왼쪽으로 돌아눕고 하면서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한 거 같다. 6시 30분. 눈 덮인 텐트 색깔이 살짝 드러날 때 눈이 뜨인다. 이제 일어나야지.

다행히도 고산증은 없다. 몸이 좀 무거운 듯하지만 머리는 맑다. 버너를 켜고 물을 올리고 또 라면을 끓인다. 식사 뒤의 차향도 좋다. ‘오늘은 뭘 하지? 하루 쉬기로 했는데. 아침 식사는 했고, 텐트 밖을 나가기는 싫다. 한숨 잘까? 뭐 그것도 좋지.’ 좀 더 쉬기로 한다. 8시가 넘어가니 해가 나서 눈을 가린 채 다시 눕는다. 침낭 안이 따뜻하니 좋다. ‘와이파이를 쓰려면 안테나 근처로 가야 하는데, 우짜지? 좀 따뜻해지면 갈까? 좀 더 쉬기로 하자.’

10시. 쉬어도 쉬어도 몸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피로가 더 쌓이는 느낌이다. 기분도 별로이다. 일어나려고 하지만 등산화 신기가 싫다. 좀 더 쉬자. 10시 30분. 병원 텐트에 가서 몸 상태를 점검하기로 한다. 혈압이나 혈중 산소 포화도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검사해 보자. 

일어나서 등산화를 신으려니 안 쉽다.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발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일어서니 살짝 어지럽다. 그런데 햇살은 와 이리 따갑노? 눈에 반사된 햇살이 살갗을 태울 기세다.

의료 텐트는 한 15m 거리의 살짝 오르막에 있다. 어제는 1분도 안 걸렸는데 한 걸음이 어렵다. 왜 이러지? 숨도 차고, 빨리 가고 싶지만 숨은 더 가쁘다. 바로 앞에서 편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야속하기만 하다. 병원 텐트 문을 여니 두세 명의 사람들이 달려온다. 나는 바로 눕혀지고 옷은 풀어지고 산소통을 가져와서 코에 산소를 넣기 시작한다.

‘아, 이거 뭐지? 내가 환자인가?’ 혈압을 재고 산소 포화도 재는 집게도 계속 물려 놓는다. 한 10분 지났을까, 몇 사람이 더 온다. 아, 여기는 초음파 검사기도 있는 건가? 여러 의료 기기들이 등장한다. 분홍색 약 몇 알, 하늘색 약도 몇 알. 한 30분 사이에 세 번의 약을 먹는다. 뭔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하다.

안데스의 아콩카과에 오르는 길이 내게는 생각보다 힘들다.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 헬기로 후송 중. 그러나 바깥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안데스의 아콩카과에 오르는 길이 내게는 생각보다 힘들다.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 헬기로 후송 중. 그러나 바깥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서류 하나를 가져 와 서명을 하라는데, 헬기 관련이라고 한다. 마침내 들것도 등장.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으니, 나를 병원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가슴에 아무런 통증이 없냐고 대여섯 번 물어서 그때마다 안 아프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다. 고소증은 하산하면 낫는 건데 병원까지 간다고 하니 황당하다. 내 텐트 색깔을 묻는다. 잉카(=여행사) 직원들이 정리해서 내려보낸다고 한다. 아, 등반은 여기서 끝인가 보다. 

헬기장은 캠프에서 좀 떨어진 곳이다. 나는 6명이 드는 들것에 꽁꽁 묶인 채로 의료 텐트를 나간다. 헬기가 착륙하면서 만드는 바람이 베이스캠프를 날려버릴 것만 같다. 모두 바짝 엎드리고, 나는 산소통과 같이 헬기에 태워진다. 안전띠를 매어주는 캠프 직원의 눈빛이 따뜻하다. 엄지척을 해 주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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