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가 훈요 10조에 남긴 팔관회와 연등회
‘고려 시대에 가장 비중이 컸던 국가 중요 의례’

고려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훈요십조가 실린 고려사 표지.
고려태조가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훈요십조가 실린 고려사 표지.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여섯 번째로 말하기를, 연등은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고, 팔관은 ‘하늘의 신령’과 ‘오악 명산’과 ‘큰 강의 용신’을 섬기는 것이다. 훗날 간신이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는 자가 있으면 단연코 금지해야 한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기로 하였으니, 공경스럽게 이를 따라 행하라.”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이 남겼다는 훈요 10조의 여섯째 항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팔관회와 연등회는 고려 시대에 가장 비중이 컸던 국가 의례라 할 수 있다.
이런 태조의 어명에도 팔관회와 연등회는 한때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려 6대 왕 성종이 국비 소모 등을 이유로 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8대 왕 현종은 이를 되살렸다. 이후 두 행사는 고려 왕조가 끝날 때까지 국가의 중요 의례로 이어졌다.
두 의례 모두 불교 색채가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그중 불교 색채를 더 짙게 띠는 것으로 연등회를 꼽는다. 반면에 팔관회는 고유의 민속신앙이 함께 녹아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개최 시기도 다르다. 연등회의 개최 시기는 부처가 태어났다는 봄이며, 팔관회는 음력 10월과 11월의 가을에 열렸다. 더 자세한 내용을 살피자면 다음과 같다.

인도 수행의식에서 온 팔관회.
인도 수행의식에서 온 팔관회.

팔관회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팔관회는 고대 인도의 수행의식인 팔계재(八戒齋)에서 비롯됐다. 팔계재는 재가 신도가 하루 동안에 계율을 받아 지키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팔관회는 고대 신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고려 때 연례적인 국가 의례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삼국사기에는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을 승통으로 모시고 처음으로 백좌강회와 팔관지법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팔관회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이어 572년(진흥왕 33)과 통일신라 말인 898년(효공왕 2)에 팔관회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645년(선덕여왕)에 황룡사 9층 탑과 함께 팔관회가 한 번 언급된다.
팔관회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있다. 첫째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등 고대 10월의 제천 의례를 원류로 한 민족 고유의 제전으로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밤새 등불을 밝히는 동지(冬至) 의례의 성격을 지닌다는 관점이다. 셋째는 신라의 호국 불교의 의례를 고려 시기에 발전시킨 국가 불교 의례로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관점이 어떻든, 팔관회의 사상적 배경으로 “토착 신앙과 불교 의례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통설”이라고 사전은 소개하고 있다.

등불을 밝혀 석가의 탄신을 축하하는 의식, 연등회.
등불을 밝혀 석가의 탄신을 축하하는 의식, 연등회.

연등회
“등불을 밝혀 석가의 탄신을 축하하는 의식. 연등(燃燈)은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해 온 불교의식이다. 불교에서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세상을 밝히는 지혜에 비유하고 석가 생존 시부터 부처님 앞에 불을 밝히는 연등 공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연등회를 정의한 내용이다. 그 유래가 불교에 있음을 명확히 한 셈이다.
우리나라의 연등 행사에 관한 최초 기록은 866년(경문왕 6)에 나온다. 삼국사기에 있는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라는 대목이다. 이때는 석가탄신일이 아니라 정월에 했던가 보다. 고려 시대에는 음력 2월 보름(상원 연등회)과 사월 초파일에 연등회가 열렸다. 민간에서는 점차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자리를 잡았다.
숭유억불 정책을 편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구습이라 하여 상원 연등회가 폐지됐다. 반면에 사월 초파일 연등회는 연등놀이로 계승됐다. 민가에서는 자녀의 수대로 등을 달아 9일까지 밝혔다고 한다.
연등회는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가 2020년 11월 17일에 ‘등재 권고’ 했고, 무형유산위원회가 같은 해 12월 16일에 등재를 확정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