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전 민간인 학살, 사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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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전 민간인 학살, 사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
  • 강무성 기자
  • 승인 2023.09.1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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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아물지 않은 ‘민간인 학살’의 상처, 어떻게 보듬어야 하나 ①

노산공원, 질매섬, 석계리 야산 등 보도연맹원 학살
곤명면 마곡리 조장리 등 미군 폭격 민간인 희생도
2009년 1기 진실화해위서 26명 만 진실규명 받아
2010년 이후 매년 한 차례 희생자 합동위령제 지내
2기 진실화해위 조사 시작…20여 명 추가 조사 진행

사천지역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민보도연맹사건, 미군 폭격 등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희생당했다. 하지만 2009년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희생자는 26명에 그쳤다. 다행히 2기 진실화해위가 1기에서 진실규명이 되지 못한 유족들의 추가 진실규명조사에 나선 상태다. 이에 사천지역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 문제를 되짚어 보고, 타 지역의 유사한 사건들이 어떻게 진실규명이 됐는지 돌아본다. 또한 다른 지역 민간인 학살 관련 발굴작업과 기록화사업, 위령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 지역 실정에 맞는 기림 사업은 가능한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 7월 27일 사남면에 있는 사천왕사에서 제14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지난 7월 27일 사남면에 있는 사천왕사에서 제14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뉴스사천=강무성 기자] 제2기 진실화해위는 2023년 9월 최근 사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과 예비검속 사건 등과 관련해, 유족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사천보다 먼저 민간인 학살 관련 추가 조사를 진행했던 진주에서는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해 48명이 추가 진실규명을 받았다. 사천에서는 2기 진실화해위 출범에 맞춰 22명의 유족이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대부분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며, 일부 미군 폭격 희생자 유족도 있다. 

사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사천지역에서 어떻게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을까. 먼저 국민보도연맹 사건부터 살펴보자. 

국민보도연맹은 ‘전향자를 계몽/지도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받아들인다’는 목적으로 1949년4월20일에 결성된 단체다. 김효석 당시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백한성 법무부차관, 장경근 내무부차관, 옥선진 대검찰청 차장이 부총재를 맡는 등 정부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관변단체였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개최했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하면서,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삼천포경찰서 남양지서 특공대원이었던 김아무개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천지역 면단위 보도연맹 결성 시기는 1950년 1월로 추정된다. 

국민보도연맹은 당초 남로당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 전향을 결정한 사람들을 가입대상으로 삼았으나, 가입 인원이 없자 회유와 협박으로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을 가입시켰다. 실제 인원을 채우기 위해 일반 주민들에게 비료와 밀가루를 미끼로 가입을 유도했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빨갱이로 물린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사천지역 역시 타 시군과 마찬가지로 수 백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조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는 사천지역 희생자들은 주로 경찰의 강요 또는 권유로 보도연맹원으로 가입됐던 것으로 판단했다. 당시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관리하기 위해 우익청년단을 이용하기도 했다. 

사천지역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들은 1950년 7월경 경찰에 의해 삼천포경찰서와 각 지서에 소집돼 구금됐다. 당시 보도연맹원 소집 과정에서 우익청년단도 일부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산공원, 질매섬 등에서 총살
1950년 7월 각 지서에서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삼천포경찰서로 이송됐고, 삼천포 노산공원과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일원에서 희생됐다. 노산공원에서 학살은 7월 17일과 31일, 질매섬 학살은 7월 25일과 26일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천지서에 구금됐던 사람들은 삼천포경찰서 이송 도중 트럭이 고장을 일으켜 용현면 석계리 야산(일명 별벽)에서 사살당했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경찰의 소집 명령에 자진 출두했고, 대부분 출두 1~2일 만에 사살당했다. 용현면 석계리 야산과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에서는 각각 수십명이 숨졌다. 

삼천포 노산공원. 이곳에서도 1950년 7월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삼천포 노산공원. 이곳에서도 1950년 7월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사천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이들은 대부분 유족이 시신을 수습해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1기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도 노산공원, 질매섬, 석계리 야산에서 시신을 수습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 때문에 학살 매장지 발굴 조사 계획은 없는 상황이다. 

용현면 석계리 야산. 이곳 산비탈에서 수십 명이 학살됐다.
용현면 석계리 야산. 이곳 산비탈에서 수십 명이 학살됐다.

민간인 학살 전 노산공원과 질매섬에는 미리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으며, 석계리 야산은 경사진 곳을 이용해 즉석에서 구덩이를 팠던 것으로 조사됐다. 유족들은 “여름철이라 시신을 알아볼 수 없어 옷을 보고 신원을 확인했다”고 진술했다.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이 섬의 가운데쯤에서 민간인 수 십 명이 학살 당했다.
고성군 하일면 질매섬. 이 섬의 가운데쯤에서 민간인 수 십 명이 학살 당했다.

당시 사천지역 보도연맹원 사건 희생자는 최소 1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됐으나, 1기 진실화해위에서는 22명에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된 분들 외에 다수 민간인이 더 숨졌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실제 희생자 수에 비해 적은 규모였지만, 당시 진실규명이 사천지역 민간인희생자 유족회 결성의 계기가 됐다. 

이 외에 1949년 늦여름, 와룡산 부근에 자주 출몰하던 빨치산들이 그의 과수원을 다녀간 다음날 경찰에 의해 총살된 4명의 희생도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미군 폭격 희생자, 진실규명 불능
당시 미군 폭격과 미 지상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진실규명 불능 결정이 나왔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한 달여 만인 8월 2일. 마곡리 주민들은 인민군의 점령에 들어간 마을과 인근 지역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예상됨에 따라 마곡천 둑방으로 나갔다. 흰옷을 입고 흰 천을 흔들면 민간인으로 알고 폭격하지 않을 것이란 소문을 믿었기 때문이다. 피난길에 오르다 합류한 이들도 함께였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미군 전투기는 손을 흔드는 마을주민과 피난민들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폭탄 투하는 물론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이로 인해 최소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비슷한 사건은 곤명면 조장리와 봉계리, 서포면 외구리 등에서도 있었다. 당시 각 지역마다 여러 명에서 수십 명의 희생자가 각각 발생했지만, 1기 진실화해위에서는 “폭격의 불법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진실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그 이후로도 미군 폭격 등에 의한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들은 특별법 제정과 진실규명을 요구해 왔다. 용현면에서도 미 지상군의 오인 사격으로 인한 희생자가 나왔다. 

2010년 이후 합동위령제 지내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 희생사건이 있은 지 60년 만인 지난 2010년 12월 8일 사천유족회 주관으로 첫 합동위령제가 사천문화원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후 매회 한 차례 뉴스사천, 사천진보연합, 사천시 등의 후원으로 사천문화원 등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내다가, 2014년부터는 사남면 소재 사천왕사로 자리를 옮겨 위령제를 지내게 됐다. 

지난 7월 27일 사천왕사에서는 제14회 ‘한국전쟁 전후 사천지역 민간인 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2009년 1기 진실화해위 조사 당시 70대~80대였던 유족들은 어느덧 80대~90대가 됐고, 일부 유족은 세상을 떠났다. 

위령제 당시 안승한 사천유족회장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죄목과 법적인 절차도 없이 경찰, 군인 등을 앞세워 가족도 모르게 산야와 계곡, 바다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며 “우리 유족들은 연좌제 굴레에 얽혀 어렵게 살아오면서 하소연 한마디 하기 어려웠고, 억울함 속에서 가슴 속 깊이 멍이 들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정현호 전 사천유족회장은 “2기 진실화해위 조사가 시작됐으니 더 많은 이들이 진실규명을 받았으면 좋겠다. 1기 때 진실규명을 받고도, 국가상대로 소송을 하지 못한 분도 있다”며 “사천은 진실규명을 받은 분도 적고, 대부분 연로해 위령비를 세워달라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이번 2기 조사를 계기로 사천에 맞는 위령사업도 고민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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