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터지고 척박하던 시기에 사진기를 마련하다
“카메라를 갖고 싶어 꾀도 내고 거짓말도 하고 그랬지”
“주머니는 늘 말랐지만”…교재 만들고, 마을 사진 찍고

[뉴스사천=하병주 기자] 박연묵 관장은 용현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9년에 진주중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기록하는 습관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싹튼다. 첫 시작은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그러다 차츰 사진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그러다 사진기를 직접 마련하게 되는데, 시쳇말로 엄청나게 간 큰 행동이었노라 고백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육이오(한국전쟁)가 터졌는데, 그 난리야 길게 말할 필요도 없고. 다행히 우리 동네는 금방 스쳐 지나갔지. 그 무렵부터 사진에 관심을 가졌어. 사진기가 갖고 싶어 부모님을 졸랐는데, 꾀를 좀 냈지. ‘돈을 벌 수 있다’ 이렇게! 그걸 어린 학생인 내가 할 수는 없으니, 고모 집 핑계를 댔어. 고모부 남동생이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허리를 크게 다쳐 집에만 있었거든. 그렇게 둘러대곤 사진관에서 쓰는 큰 사진기를 샀는데, 생각보다 돈벌이가 안 되는 기라. 나는 내 취미도 하고, 고모 집에는 돈도 벌고 할 줄 알았는데. 처음 하다 보니 시행착오만 겪었지.”
첫 사진기는 품에 오래 두지 못했다. 부모님은 그 사진기를 고모네에 팔아버렸다. 박연묵 관장은 자신만의 사진기를 다시 마련하리라 마음먹고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당시에 귀하디귀한 사진기를 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약방을 운영하던 그의 할아버지가 일손을 놓고부터는 농사로 가정을 꾸렸던 그의 부모다.
“책 산다 뭣 산다 하며 거짓말을 많이 했던 것 같아. 그렇게 모은 돈으로 부산에 직접 가서 중고 카메라를 하나 샀지. 51년인가 52년인가? 그때도 학생일 땐데, 지금 생각하모 나 참, 허허허!”
이 대목에서 잠깐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박 관장이다. 하지만 이 사진기로 찍은 사진과 추억을 떠올릴 땐 다시 초롱초롱 눈이 빛났다.
“내가 학생이고 총각 땐 동네 처녀들 사진을 많이도 찍어 줬다. 그렇다고 돈을 받을 수 있나. 그냥 취미로 하는 거니까 공짜였지. 전쟁 무렵 진주에는 ‘기념사진관’이라고 하나가 남아 움막을 치고 영업을 했는데, 필름 사고 인화하는 게 싸지 않으니 주머니는 늘 말라 있었지.”
박연묵 관장이 교사가 된 이후로는 학생들을 위한 교재 만들기에 사진기를 썼다. 특히 장미꽃이 피는 모습을 차례로 촬영해 만든 교재는 인기가 많아 동료 교사들로부터 새로운 주문이 이어지기도 했단다.
시간이 점점 흘러, 박 관장은 마을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신복마을 풍경 사진과 용현면 사진첩이다.

“마을 풍경 사진은 1986년에 전문 사진사의 도움을 받아 찍었다. 그걸 크게 뽑아서 액자에 넣어 걸어 놓았더니 너도나도 해달라는 거야. 그래서 마을 집집이 만들어주고, 시집가는 사람이나 출향인들이 부탁하면 해줬지. 실비는 받고. 이걸 하고 나니까 용현면 전체로 눈이 가는 거야. 될수록 금방 없어질 곳, 외딴곳 위주로 찍었는데, 2년간 자전거를 타고 용현면 구석구석을 올매나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용현면 사진첩은 1994년에 시작해 1996년에 완성했다. 그는 두 부를 제작해 하나는 집에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용현면에 기증했다. 그의 70년 지기 낡은 펜탁스 사진기는 수많은 기록을 남기는 데 훌륭한 도구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최근까지도 박연묵교육박물관을 찾는 이를 기록하는 데 쓰이다가 지금은 진주교육대학교에 전시돼 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