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춤 전도사 구영미 선생.. “춤을 가르치지만 삶을 배워”
“하나 둘 셋 넷.. 앞으로, 뒤로, 한 바퀴 돌아 멈추고...”
이 복지관 강당에서는 20,30대의 젊은 여성부터 일흔에 가까운 할머니들까지, 스물 명 남짓이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가르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용가 구영미(38) 씨. 그녀는 사천을 중심무대로 춤을 보급하는 ‘춤 전도사’다.
구 씨의 꿈은 춤과 무용을 전공할 전문가를 길러내기보다 순수 춤 동호인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곤양의 춤 동호회 말고도 사천에만 여섯 동호회를 더 지도하고 있다. 국민생활체육회사천시전통무용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녀는 춤을 보급하는 일 자체가 즐거움이란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대학까지 가며 춤을 제대로 배웠다. 어릴 적 우연히 집 근처 무용학원에 들렀다가 원장으로부터 ‘끼’를 인정받은 게 계기가 됐다. 이후 중고등학교 학창시절에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등으로 교내행사를 누볐다고.
또 한국무용 전공을 살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인 가산오광대보존회 전수자장학생으로도 활동 중이며, 무용에 꼭 필요한 분장과 미용에 관한 자격도 갖추고 있다.
체육실기 교원자격도 있는 구 씨는 실기뿐 아니라 이론도 갖추기 위해 현재 국립경상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자신의 능력 개발에 끊임없이 정성을 쏟는 그녀다.
그러나 여기 오기까지 고난도 컸단다. 춤을 막 시작했을 무렵, 아버지가 쓰러져 식물인간으로 몇 년을 보내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대학을 갈까 말까도 고민이었다. 결국 첫 등록금만 지원해주면 혼자 힘으로 공부를 마치겠다는 약속을 어머니와 하고는 대학에 진학했고, 이후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 왔다. 1997년, 사천여고 축제행사에 마스게임 연출을 맡게 된 것이다. 이 행사로 그녀의 재능이 지역사회에 알려졌고, 이후 와룡문화제 개막공연의 안무를 맡는 등 굵직한 지역행사에서 실력을 뽐냈다.
구 씨는 자신의 재능을 지역사회에 펼칠 수 있음을 무척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봉사와 접목시키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노인단체나 정신병원 등에서 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물론 강사 신분이었지만 사실상 봉사활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노인과 주부 등 무용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생활 속에서 춤을 즐기는 사람들을 더 늘려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민자치센터나 사회복지시설 등을 돌아다니며 춤을 가르쳤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용예술치료’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구 씨가 주로 만나는 사람은 정말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조금은 민감할 수 있는 행사에도 곧잘 모습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2002년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는 사고로 전국적인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그녀는 ‘효순이 미선이’ 두 영혼을 달래는 진혼무를 췄다. 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제에도 참여해 살풀이춤을 추기도 했다.
지역사회가 비교적 ‘보수’에 가까운 점을 감안하면 그녀의 이런 행동에는 용기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은데, 설명은 의외로 간단하다.
구 씨는 지금 사천시민들에게 선보일 큼직한 행사 하나를 준비하느라 가슴 설레고 있다. 행사명은 ‘사천시 전통무용연합회 발표회’다. 그녀가 ‘춤 동호인 저변확대’를 위해 꾸준히 걸어온 길이 작은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그녀가 가르친 200여 명의 제자가 자신의 안무를 소화해 무대에 오른다. 젊은 새댁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순수 아마추어들이다. 공연은 7월10일 저녁7시, 사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진다.
“아직 어설프지만 공연을 함으로써 저마다 자신감이 커질 거라 믿습니다. 많이 구경 오셔서 격려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죽어서도 춤을 추고 싶다”는 춤꾼 구영미 씨. 그녀가 자신의 꿈을 어떻게 이뤄 나가는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