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화천 기행/산자분수령 낙남정맥은 끊어지고 강은 거꾸로 흘러라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한국 고지리서 산경표의 기본개념으로,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은 스스로 물을 나누는 고개가 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과 강은 하나이고 이는 유기체적 자연의 선순환 구조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1866년에 이르러 이 산경표를 대동여지도의 근본을 삼았다 한다.
남덕유산이 발원인 경호강과 지리산에서 시작한 덕천강은 진양에 이르러 남강으로 모이고 남강은 영남의 남도를 휘감아 낙동강의 지류가 된다. 수백리 물길을 굽이 돌아 천천히 낙동강에 이르러 바다로 간다.
구한말 마지막 진주관찰사 황철이 부임해 있던 시절 영남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남강홍수를 방지함에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 있으니 이는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하는 것이다. 이는 치수와 8천 정보의 비옥한 토지를 얻게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1937년8월27일 이른바 병자년 대홍수에서는 진주읍내 6700여호의 가옥중 5500여호가 피해를 입었고 인명피해만도 101명에 이르렀다고 ‘남성공론’이라는 잡지에 실렸단다.
오늘의 진양호에는 한가로이 가족나들이객들과 연인이 산책중이다. 수자원공사의 물박물관이 있는 기념공원에서 바라보는 진양호는 당초 하루 강수량 400밀리를 견디게 설계된 것이81년 태풍 애그니스의 543밀리의 강우에 조절능력이 없음이 판명나 1999년 새롭게 숭상 완공된 댐과 과거의 댐이 진양호 기념휘호를 두고 나란히 서있다. 3억1천만 입방미터의 저수용량을 가진 인공호수이다. 남강댐의 완공은 진주시민과 낙동강에 이르는 남강하류지역의 수해예방의 결실과 전력생산, 서부경남의 식수원이라는 다목적을 이룬듯했다.
낙남정맥이 잘리고 정맥 마루금을 대신한 유수교가 보인다. 폭 백미터가 넘게 잘려간 정맥에 아스라이 걸린 다리 유수교, 2001년 8월 준공되기 전까지 유동과 나동 간은 다리 아래 강바닥에 닦은 간이도로로 다녔단다. 그래서 가화강으로의 방류가 있을 때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삼계교까지 돌아가야 했단다. 경전철교와 유수교 아래로 보이는 콘크리트와 암반층의 붉은 빛깔은 고스란히 잘려나간 낙남정맥의 흉터이다.
문득 가화천의 발원지를 보고 싶었다. 가호마을의 실개천이었다.1983년 행정구역 개편이전에는 사천군 곤양면 가화리었던 곳이 진주시 내동면 가호리가 되버렸다. 마을 뒷산은 폐기물매립장과 공원묘지가 들어서 있다. 고풍스런 돌구름 다리 밑으로 이끼를 머금고 흘러내리기를 기대하고 이르렀을 때 역시나 콘크리트 딱딱한 다리 밑으로 그 발원인 실개천은 그런데로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유동 고개를 지나 축동면 관동마을에 이른다. 인공의 구조물은 간데없고 태고의 진흙 위를 거닐던 쥬라기시대의 공룡 발자욱이 나를 반긴다. 삼계천의 천연기념물이 거기만 국한되지 않았을터, 이 지역 모두가 천연기념물 제390호 공룡화석산지인 셈이다. 건천 사이로 파인 웅덩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물고기들이 민첩하게 사라져 그게 붕어인지 은어인지 가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여기저기 돌 틈에 박혀있는 화석이 몇 억년 넘어 이곳에 살았던 공룡의 화석이라고 생각하니 인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든다.
하류 곤양 탑동이 마주보이는 반룡마을에 이른다. 여기는 조선조때 옹기가마가 있었단다. 그때는 육로보다 해로로 물자를 날랐을 터, 나루터가 있음직한 물가에 정치그물을 쳐 놓고 방치해둬 흉물의 몰골로 흩트러지고 찢어져 물따라 나부낀다. 물가에 청둥오리떼가 먹이질을 해대고 무언가에 놀라 화더덕 날아 올라 군무를 선뵈다 이윽고 물로 첨벙 내려앉는다.
바람이 차다. 돌가에 붙은 파래가 바닷가에서 봄직하고 밀물이 들면 이까지 물이 올라오나 보다. 갈대숲사이로 쌓아둔 볏짚이 농부들의 일터인 갯논이라고 알려준다. 쉴새 없이 이는 바람에 갈대가 몸을 흔들고 갈바람에 물결의 주름이 깊어진다. 저 멀리 용수마을변에 석양이 깔린다. 가화천을 거슬러 가화마을에 당도하여 뱃길을 갈아타고 산청의 남명과 교우를 나눴던 구암선생의 이동로의 그 유람선 흔적은 지금의 상류까지는 무리인듯 싶으나 옛날에는 물이 많아 가능키도 했겠다 싶다.
단기필마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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