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구암이정학술세미나를 보고

배움이 깨달음에만 머물면 죽은 학문이고 그 깨달음이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현자(賢者)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암이정이야 말로 현자였다.

 그동안 7회에 걸쳐 열린 학술대회로 만난 구암 이정선생의 생애를 조망하고 느낀 소감이다. 그리고 사료가 적어 잊혀져 가는 소중한 현인(賢人)을 찾아 밝혀낸 것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에서 실천해 나가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의 생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다 세상을 떠나신 故오필근님께 새삼 감사의 뜻을 표한다.

▲ 이정선생은 구암정사를 짓고 동쪽에 거경제 서편에 명의제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사는 고려말서 부터 조선조에 이르기 까지 지방의 사학기관이다. 사진은 구계서원, 이곳이 구암정사인지 확실치 않으나 구암이정선생을 기려 제사를 지낸다.

구계서원 문묘에 배향되었을 뿐 현대에 조명받지 못했던 영남사림의 거인이 우리 일상에 소개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2002년도 였다. 그 선비정신을 오늘의 사천에 새롭게 뿌리내리고자 해마다 열악한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다 그 뜻이 오늘에 '구암제'로 발전한것은 또다른 선비정신의 계승으로, 경하할 일이다.

구암(龜巖)이정(李楨)선생,1512년 사천에서 나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 관직에 올라 36년간 중종,인종,명종,선조에 이르는 4조의 임금을 모시며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학문을 통해 겸비한 지식을 현실참여를 통해 실천하고 목민(牧民)하며 학문진흥을 위해 애써다 간 사천의 위대한 '선비'셨다. 그 분이 살았던 시기는 사화라 일컬어지는 정쟁이 인단락된 어수선한 속이었고 성리학에 대한 박해로 인해 변변한 책조차 귀했던 시대였다. 더군다나 이곳은 한양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사천이었다.

그러나 관포 어득강같은 걸출한 인물이, 가까운 고성에서 후학육성의 은퇴의 삶을 산 노선비와의 만남의 행운이 그에게 주어졌고, 규암 송인수같은 절개있고 강직한 인물이 유배라는 이름으로 사천에 계셨던 것이 구암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모른다. 조정에 진출함으로서 만난 퇴계 이황과 산청 덕산의 남명과의 교류 역시 선생의 학문과 삶을 살찌운 자양이었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중앙관직에 진출하셔서 돌아가신 36년여의 생동안 군수등의 외직으로 19년, 벼슬을 사직한  것이 13년, 조정에 머문 것은 겨우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대의 다산 정약용은 "참된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고 문식(文識)과 무략(武略)등에 처리하지 못할 바가 없고자 하는 선비이다" (眞儒之學 本欲治國安民 壤夷狄裕財用 能文能武 無所不當)라고 정의한바대로 구암이정은 참 선비였다.

우리 향토에는 문무와 시대를 구별하지 않고 역사를 통해 훌륭한 선비정신을 실천한 분들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지리산을 두고 백두의 정기를 부정할 수 없듯이, 역사 속에 영걸어 있는 선비정신 역시 부인될 수 없는 우리 향토의 저력이다.

 

▲ 인조23년 사천사림의 소청에 의해 '구계서원'으로 승격, 선생의 업적과 공을 기려 향사한다. 서원 뜰에는 선생을 기려 제향했던 구산사당의 사적이 남아있다.

 그러나 현실은 밝지 못하다. 학술세미나의 단상이긴 하지만 참석자 대부분은 지역의 연로한 어르신이셨고 젊은 청년이나 학생의 참석은 없었다. 현대의 사조(思潮)가 실용주의라서 인지 그닥 시대정신과 공동체정신에 대한 배려는 우리 일상에서 관심을 끌지 못한듯 하다.

다시말해 학력지상주의에 이끌려 경쟁에 내몰려 있으나 왜 학문을 하고 배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기반은 약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시험만을 위한 교육이고, 영어몰입교육에 국가가 나설지라도 국가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기 위한 역사교육과 국어교육이 뒷전인데서 나온 현상은 아닐까 싶어 걱정이 앞선다.

국어와 한문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한문을 알아야 우리 역사와 우리 글을 바르게 이해한다. 한시를 읊조리면 케케묵은 것이고 영어 팝송을 불러대면 유식해 보인다면 이는 잘못된 학문 인식이 기저에 깔려 있다 하겠다.

한편으로 젊은 사람이 즐겨 이해하고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는 우리 고장의 향토사와 선비철학으로의 접근을 유도하는 정책적 대안 역시 마련되어야 미래가 있는 공동체로 도약할 수 있다. 최근 지역사랑과 공동체로서의 사천을 만들기 위해 인재육성장학재단이 설립되고 우리고장 고등학교보내기가 잘 착근해 가고 있다.

▲ 작도정사, 관포어득강이 군수로 재직하던 곤양을 찾아 이곳 까치섬에서 스승을 알현한 퇴계이황을 기리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1928년 지어졌다. 퇴계이선생장구소 석비에는 "조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회를 치고 술을 간질함에 이르니 날은 이미 저물어 져서 헤어짐을 아쉬워 하더라"라고 적혀있다.

여기에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고 우리고장의 선조의 얼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예술과 문학과 역사적 인식이 담긴 선비철학교육의 프로그램을 도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내년부터 도입되는 구암제가 이같은 교육적 프로그램이 깃든 가운데 젊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끌어 가는 가운데, 천자문은 기본이고 소학과 동몽선습 그 위에 사서삼경 속에 담겨 있는 옛 선현의 철학이 공존하는 애향제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