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바른 한글, 온전한 한글을 생각하는 한글창제 565주년이었으면..

한글전용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한글로 읽고 쓴다. 나라의 글이 중국과 달라서 초래된 지적 양극화 해소를 위해, 겨례의 자주 자강을 위해 일찍이 개혁적으로 만드신 글이다. 국민생활 보편적 읽기 쓰기로 무지한 국민의 억울함을 없애려고 사대적 관료이자 최고의 지성인 집현전 최만리학파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반포하신 위대한 한글, 이 도구로 세상의 지혜를 구하며 살고 있다.

대명(大明)의 신하된 나라로서 법도에 어긋나느니 사(邪)된 글자로 혹세무민하여 정국을 어지럽히니 사대부가 잘 쓰고 있는 글이 있음에도 언문을 만들어 나라를 혼란케 한다는 둥, 성리학의 근간을 무너뜨린다는 둥, 내용만 달랐지 별반 지금과 다름이 없는 논쟁으로 반포에만 3년이 걸린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바탕한 한글이 올해로 565주년을 맞는다.

훈민정음 해례의 첫 장.'나라의 말이 중국어와 달라서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음에'라고 창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은 기질적으로 논쟁을 뿌리치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고 본다. 정치사에 있어서도 그렇고 해방 전후,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극명해진 이념 논쟁도 그러하다. 하지만 반대파 최만리의 상소(上疏)에서 훈민정음 보급으로 초래될 사회적 문제점은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한 부분을 옮겨 생각해보고자 한다.

               如此則數十年之後 知文字者必少 雖能以諺文而施於吏事 不知聖賢之文字
               則不學墻面 昧於事理之是非 徒工於諺文 將何用哉 我國家積累右文之化
               恐漸至掃地矣

              이 같이 시행하여 수십 년이 지난 후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반드시 적을
              것이 온데 비록 언문으로써 공직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온들 성현의
              글을 알지 못 하고 곧 배우지 못 함은 담장을 면대한 것과 같아, 사리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 힘을 쏟아 장차 무엇에 쓰겠나이까?
              우리나라에 누대(累代)로 쌓은 숭문(崇文)의 풍토가 땅을 쓴 듯 점차 사라
              질까 두렵나이다.

서두를 이렇게 꺼내 드는 것도 이 글, 또한 논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촉발된 단발령(斷髮令)에 버금가는 주장일 수도 있겠다. 특히 한글날을 맞아서 말이다. 한문교육을 새롭게 중시하자는 이야기다. 응축력(凝縮力)이 강한 글자라는 매력을 사장하는 것이 결코 한글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렇다.

1970년 한글전용정책이 교육에 도입되며 한자교육은 죽었다고 한다. 교과서에서 한문 과목을 제외하고 대부분 한자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 여파로 지금에서 한문을 읊조리면 왠지 진부하다는 느낌으로 외면하게 되고, 도서관에서 국한혼용 서적을 보면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학을 마쳐야 하는 세대가 우리 시대의 지성을 논하는 때가 돼 버렸다.

누군가 그랬다, 극에 치우치면 위험하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실사구시의 입장에서 중용이 필요하다 했다. 어렵다고 국한혼용을 막고 한글전용으로 가르치고 배우다 보니 용어에서 헤매고 개념이 바로서지 않는다. 2천년을 쌓아온 역사는 배우기도 더 어렵고 인접 학문을 이해함에 있어 적확성(的確性)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사회 수업시간에 우리나라의 정치는 삼권분립이라 배웠고 삼권은 입법 사법 행정이라고 하는데 이게 도무지 글인가, 말인가 했던 경험이 있다. 제도의 안정성을 배우는데 용어에서 막히니 용어학습에 시간을 들이자니 진도를 맞추기가 어렵고 이 '사회'가 어려운 과목으로 전락했다. 하물며 '현대제도' 학습이 이럴 진데 역사는 오죽하겠고 국어학습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북 육진지방의 사민입거책(徙民入居策)을 제시하였고, 북도 일원을 순찰한 뒤 무산·풍산지방의 이배도(移排圖)를 제작하여 진상하기도 하였다. 1512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대간들로부터 탐오(貪汚)하다는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한 벼슬아치의 이력에 관한 내용이다. 같은 한글로 된 말인데 참으로 스트레스 유발이 심한 글이고 12년을 배운 머리로 읽기는 하나 내용보다 용어해독이 어렵다. 그 시절 옳은 한문교육만 있었다면 막힐 이유가 없는 용어인데 말이다. 중학교 시절 삼권분립의 혼돈에 그치지 않고 이 같은 스트레스는 현대 산문의 독해에서도 투과되어 지금 대부분의 한글전용세대가 겪고 있는 고충이다.

자국의 글이 없어 한자를 차용하여 말을 표현했던 나라는 우리 가까이 일본도 있다. 훈민정음을 계기로 우리가 한글을 가졌다면 일본은 '가나(板名')라는 자국 글을 갖고 있다. 글이 어려워 변화를 꾀한 나라도 있다. 중국이다. 공산국가체제에 들어 기존 '번체자’(繁體字)를 버리고 '간화자'(簡化字)라는 전혀 별개의 한자약어체로 자국의 글을 표현하고 있다.

뜻글자 한자가 지닌 응축성과 항구성을 바탕으로 소리글 '한글'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날생(生),밝을명(明),소리성(聲), 형통할 형(亨)을 운(韻)으로 구암이정선생을 기리는 문장이 제1회 구암제 과시로 나왔다.

우리를 포함해 한문으로 통했던 동북아시아3국을 한자문화권이라고 말한다. 한때나마 아버지세대에는 서로 말은 몰라도 한자를 이용한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말이다.

한자 속에 역사와 문화를 담아온 3국이 현대에 들어 그 사용을 제한한 것이 문맹률을 낮추어 문자 해독률을 높이자는 차원이라니 어떻게 보면 한자가 어렵긴 어렵나보다. 오죽하면 근대중국의  5·4 운동을 주도한 푸쓰녠(傅斯年) 같은 인물도 한자를 일컬어, “소와 뱀 같은 귀신의 문자”(牛鬼蛇神的文字)라고 혹평하였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한자가 망하지 않으면 중국이 반드시 망한다(漢字不滅, 中國必亡.)”고까지 주장하였겠는가. 그 결과 보편의 득해율은 올렸는지 모르겠는데 지성의 전문성을 떨어트려 버렸다.

주제에서 벗어나 곁가지를 쳤다. 결과적으로 어렵다고 버렸거나 없어도 불편할 것 같지 않아 없애 보았는데 없애고 나니 잃어버린 것 또한 커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최근 외국어 학습의 붐이 일고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의 열풍이 영어 정도는 아니더라도 버금가리 만큼은 된다. 그러나 입문 이후 커다란 장벽에 막혀 꼼짝을 못한다. 바로 한자의 벽이다. 한자실력이 어느 정도 갖춘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국어 실력 뿐 만아니라 외국어 학습능력에서도 자명하게 나타난다. 한자문화권이었기에 자연스런 언어습득의 좋은 기회가 한글전용으로 멀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전 세계 20%가 사용한다는 중국어, 세계 경제대국인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소통하는 도구를 한자를 통해 가질 수 있는데 말이다. 미래를 동북아주도시대라고 보는데 그 소통의 틀인 언어를 놓쳐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생긴다.

지금이라도 국한혼용은 불가능할지라도 국한병용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주장을 하려고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작금에서라도 시작해 보는 용기를 가져 보자는 이야기다. 결코 지금 대세를 이룬 한자능력시험 따위의 자격증 스팩을 쌓기 위해서가 아닌 더 큰 실용적인 그 무엇을 얻기 위해서 살려 보자는 이야기이다.

일본 메이지유신은 동경에서 거창하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동해의 남쪽 끝, 야마구치 변방의 하기(秋)와 가고시마의 사스마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무슨 거창한 제도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집 우리 자녀에게 오늘부터라도 한자의 바른 학습법을 심어주는 지혜의 지성불을 하나씩 켜 보자는 이야기다. 사천이라는 지역의 작은 변화가 대한민국의 경쟁력으로 바꿀 수 있는게 한자교육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구암제의 백미, 과시 재현, 이날 과장에는 나이 지긋하신 유생들이 시험장에 나오셨다. 한자교육의 현 세태를 반영하는듯 하여 안타깝다.

작년 제1회 구암제의 백미는 무엇보다 과거시험의 재현이었지만 아쉽게도 과거 입시생은 노학(老學)들이셨다. 한문이 교육에서 멀어짐으로 구암 이정의 정신을 계승한 선비문화의 현대 구현도 큰 암초를 만난듯하여 당황스러웠다. 공유하는 철학이 부재한 가운데의 잔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성리학의 부침을 논하고 현대 성리학의 요불요(要不要)를 논하기에 앞서 온고지신의 마음으로 과거 속에 녹아 있는 한국적 지성과 철학을 옳게 찾아 계승하는 것의 출발이 새로운 한자교육이라면 비약이라 하겠는가?

시범사업도 좋고 문화관광도 좋지만 무엇보다 세계 속의 한국 그 속에 빛나는 향토문화를 이야기하려면 또 그 지성으로 학업을 이어가야 한다면 내 가정 내 자녀에게 가르치고 같이 배우는 학문으로 한문을 권하고 싶다. 좁은 식견이고 작은 지식이지만 필자의 경험으로 비추어 한자는 보기보다 실용적 유용성이 크다.

역사학습에 더 없는 도구가 되어 주었고 공부 해본 적 없는 중국어도 도전해 보고 싶은 자신감을 준 것이 한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든가? 대학 다니는 딸이나 중학생 자식들의 한문 점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신기에 가깝게 빵점짜리 실력들이었다. 아이들의 눈에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박힌 한문을 접하고 이 글을 꼭 쓰고 싶었다. 한자를 가르치니 여타 학과목이 동반하여 상승하고 그 속에서 큰 빛 하나를 보아 이 글을 쓰게 된다.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원고료를 지급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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