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재발견-3. 세속적 삶의 아름다움

붓다는 눈을 크게 뜨고 높고 먼 세상을 살펴볼 수도,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 심안으로 우주의 이치를 살필 수 있음에도, 뜨지 않고 감지 않고 '반개'해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심층의 형이하학도 아닌, 상층의 형이상학도 아닌 표층,표면의 일상학, 중간학적 삶의 표현으로서의 반개가 난 붓다의 모든 깨달음적 표현이라 감히 생각한다.

6년이 넘는 금욕적 수행과 단식, 명상을 통해 심층과 상층을 다 경험하신 그 분이, 비로서 깨달음의 순간엔 새벽별의 반짝임을 보시고 정각을 이루심은, 깨달음은 무엇이고, 깨닫기 위한 행위는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한다.

깨달음이란, 에고의 부재인데 에고는 감각의 다발 덩어리라 말한다. 감각이란 언어와 지각의 인과적, 집적 결과로 이루어진 기호와 의미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깊고 풍부한 지식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관념과 사유의 극과 극, 내부와 외부의 이분법적 경계 안에 머무는 행위이다. 반드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넘어선 '바깥'의 경험을 통해서만이 에고의 부재를 우린 경험할 수 있다.

'바깥'의 경험이란 언어와 이성을 넘어선 우주의 맥박소리를 경험하는 심층적 경험이다. "사마디"의 경험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주와의 일체감, 사마디의 경험은 순간이고 다시 흐름으로 이어진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와 정보를 가진 채, 생성-발전-소멸이라는 차이나는 반복의 거대한 파노라마적 흐름속에 존재한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결합된 '카오스모스'로의 흐름이다. 즉 "위빠사나"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붓다의 얼굴. 기자의 방에 걸려있다.
여기서 불성의 깨달음의 세속적 활력으로서의 '일상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24시간을 사마디와 위빠사나의 상태에 있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붓다는 24시간을 위빠사나 수행을 하셨다고 하시지만, 우리와 같은 범부에겐 하루 1초의 사마디 수행도 힘들다.

그럼 도대체 반개의 의미와 일상의 삶 그리고 범부들이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것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가능성', '잠재성'으로서의 불성이라 생각한다.

감을 수도, 뜰 수도 있는 잠재성으로서 무한한 가능성, 현실화될, 불성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조건으로서의 반개!!!

심층과 상층은 완결된 하나의 상태, 결과가 아닌 그렇게 되어 질 수 있는 과정적 운동, 활력, 생성으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생성,변화는 '사이'에서 나타난다"라는 들뢰즈의 표현을 떠올리며.

불성의 무한한 가능적,잠재적 존재로 살아가는 범부는 몇 세대를 거쳐 좋은 인연과 수행을 통해 비로서 '눈을 뜬 자'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심층과 상층의 뜨거운 열기의 '표면효과'가 바로 세속적, 일상적 삶인 것이다. '이것은 저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듯 미소와 반개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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