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숲』 김산하 | 사이언스북스
“이제 비숲으로부터 나를 거두련다. 집으로 돌아가련다. 내가 남긴 엷은 흔적들일랑 대자연이 지혜롭게 지워 주리라 믿는다. 며칠만 지나면 숲 여기저기에 뿌린 내 수많은 발자국은 비에 쓸려 사라지고 없을 것이며, 내가 낸 좁은 길도 금세 뒤덮여 더 이상 길이 아닐 것이다. (..) 꿈결 같은 이곳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문명 세계로 돌아가면, 긴팔원숭이의 갖가지 행적을 좇았던 나만의 비숲 전래 동화들은 딱딱하고 객관적인 글과 수치로써 학계에 보고될 것이다. 아무도 존재조차 몰랐던 이 특정 영장류 가족들의 하루 일과와 식사 버릇이 전 세계에서 열람이 되도록 문서와 정보로써 호환될 것이다. 극히 작은 과학적 보탬이고 미약한 학문적 기여이지만, 나무 사이를 넘실거리는 나의 사랑하는 벗들을 역사 속에 기록해 둘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경견한 영예로움을 느낀다. 나무 위의 그들, 땅 위의 나. 우리 사이의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은 비숲, 비가 내린다. 비가 내 얼굴을 적신다. 눈물과 비가 섞인다, 내 심장에서도.” 『비숲』, 김산하, 사이언스북스, 2015, 347-8쪽

작년의 내게 커다란 즐거움은 토요일마다 모 신문사에서 연재되는 칼럼 <김산하의 탐험>을 읽는 일이었다. 낯선 밀림으로 긴팔원숭이라는 낯선 존재를 조사 온 한 젊은 연구자의 흥분과 외로움, 일시적 방문객으로서의 조심스러움과 존중, 그리고 그 자신과 연구 대상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하루하루에 묻어 있는 글이었다. 고요하지 않은 일상을 생생하고 태연하게 들려주는 문장들은 경쾌하고, 흥미진진하며, 또한 감동적이다. 반갑게도 이 연재물이 최근, 책으로 묶여 나왔다.

내게는 그의 글이 처음으로 공들여 읽은 ‘과학자’의 글이었다. 그의 문체는 문학적이고 감각적이지만, 그의 글은 어찌됐든 과학자의 것이란 사실이 준 호기심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듯 언젠가의 지식인들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통달한 만능인에 가까웠지만, 지금처럼 모든 영역이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분화된 시대의 내게, 분야를 나누어 사고하는 편협한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이러한 편견은 통쾌하게 깨 준 작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두 발과 몸으로 야생을 헤치면서, 그 곳에 몸 담그며 연구하는 방법론을 익혀온 과학자라는 것은 그의 글쓰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가 강조하다시피 긴팔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은 인간과 굉장히 비슷한 점들을 공유하고 있으며, 인류의 비밀을 몸에 새기고 있을 지 모른다. 인간의 근원에 대해 추적해 들어간다는 근본적인 어떤 면에서는, 내가 공부해 온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와도 통하는 면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열대우림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빛이 밤을 채 침투하기도 전”에 아침이 시작되는, 온전히 야생동물과 식물들의 공간, 이질적 존재인 인간에겐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 그러나 점점 파괴되어 온 곳, 인간이 없애온 곳, 그렇지만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생명들과 빛과, 그늘, 나무, 빗물을 머금은 곳, 비숲(rain forest)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도 이 책은, 커다란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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