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암 석굴은 욕진왜병(欲鎭倭兵)과 통일의 징표?

경남 사천의 이름 없는 산에서 삼국통일의 중흥조인 문무대왕을 만난다니 제목부터가 생뚱맞다. 신라의 수도는 경주이고 문무대왕을 찾으려면 경주로 가야 하지만, 봉명산에서 문무대왕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이를 증명하려면 뭔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다솔사 진입로. 향긋한 솔숲 저너머는 미지의 전설을 머금고, 현세의 소경 눈을 부처의 해안인 관음(觀音)으로 풀기 위해 천년을 기다린듯 하다.

사천이 군(郡)이었던 시절 사천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 봉명산이다. 그 산은 다솔사라는 유명한 절을 품고 있다. 신라시대의 사찰이 있어 그 유명세로 사천군립공원인가 하는 정도가 일반적 시각이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진 이는 백두대간의 산경표를 주목하는 산(山)사람이다.

산경표는 백두산에서 백두대간을 지나 우리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산의 흐름을 기록한 일종의 지도인데 이 산경표를 따라 물 흐름과 산의 정기를 읽어 내린다. 이 산경표에 의하면 백두대간의 큰 흐름은 지리산에 이르러 세갈래로 나뉜다. 지리산의 남악인 봉명산 황치에 영근 정기가, 하동 금오산으로해서 남해 금산으로, 또 한 자락은 남강댐 방수로에 정맥을 잘리긴 하나 그 끝은 김해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흘러 가는 정맥은 봉명산을 지나서 서포자락의 다평 바다로 빠져 든다.

봉명산의 각 봉우리, 시대에 따라 봉암, 영악, 학유, 장방 등 이름도 가지각색, 이 산은 지리산에서 출발하여 곤양 맥사를 지나 서포 다평으로 해서 수궁가의 근원지인 비토 앞 바다로 들어간다.

세개의 꼬리인 낙남정맥의 본 기운은 가운데에 모이는데 그 중심 산이 봉명산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산의 정상에 용이 사는 못이 있는데 그 용이 조화를 부려, 수도 금산(경주)사람의 눈이 멀어 고통을 받았다 한다. 해서 그 못에, 불에 달군 화철석(火鐵石)을 빠트리니 그 용이 , 고개 너머로 도망을 하고,  그 이후에는 그런 일이 다시 없었다라는 전설과 함께 이 산이 그때부터 리맹산(理盲山)이라 했는데 한자 뜻풀이를 하면 '소경을 다스린다'라는 뜻이 된다. 속설에 의하면 리맹산은 신라의 수도인 금성의 비보산(山:풍수지리상 모자람을 채워줌)이었단다.

 그리고 신라의 5악(五岳)중 하나인  지리산을 남악(南岳)이라 했는데 지점을 비정해 보면 봉명산은 지리산의 남해 쪽 줄기가 된다.  봉명산은 필봉의 형세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으로, 남해 사천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봉황이 '울었다'해서 봉명산이다.  전설속 태양의 새 , 봉황은 아무 곳에 깃들지 않는단다.  봉황은 벽오동에 둥지를 트는데 그래서인지 다솔사엔 유난히 벽오동이 많다.

다솔사 적멸보궁에 이르는 108계단. 다솔사의 학당인 대양루 옆에는 벽오동의 노거수가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 온다.

 한편 다솔사는 봉명산의 서편에 암자를 하나 갖고 있다. 다솔사의 왼편 해우소를 지나 산길로 30분정도 오르면 만날수 있다. 옛날부터  비구니 몇 분이 기거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문헌상으로 서봉사에 딸린 말사였으나 서봉사가 폐사지 된 연유로 다솔사에 귀속되었단다.

다솔사의 말사 암자인 보안암은 여느 암자와 다르다. 보통은 경치 좋고,  높은 산 기슭에 기와를 얹어 목조로 지어져 있으나 이곳은 석조다. 사암질 활석을 쌓아 계단과 기초를 만들고,  큰 돌을 지붕을 이어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셔 두었다. 흡사 횡혈식 석실고분의 형태를 하고 있다.

1966년 신라오악(五岳)의 불교유적의 지표조사를 맡았던 불교미술사의 권위자인 황수영 박사에 의해 발견되고 조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도 그럴것이 석굴암의 원형복원을 수행했던 황박사는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하고 토함산의 석굴암과 팔공산의 군위삼존굴에 이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굴이라 평가했다.

 다만 조성연대에 있어 추정이긴 하나 불상양식을 미루어 려말선초(麗末鮮初)로 추정한다고 밝혔었다. 그 이후로 학계에서는 석굴암을 모방한 양식으로 보아 경주와 군위의 석굴처럼 국보에는 이르지 못하고,지금까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내려온다. 하지만 이 유형문화재가 경주 석굴암보다 창건 연대가 앞선 680년경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신라의 오악인 토함산의 동해구에 위치한 문무대왕 수중릉인 대왕암, "죽어서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받들어 조성했다. 감은사와 만파식적의 전설은 왜적의 잦은 침입에 대한 신라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본존여래의 존명(尊名)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아직도 정립이 되지 못하고 있고 형태적으로 석불인 본존을 고려시대의 철불(鐵佛)양식이라서 창건 연대를 고려초기로 보는 고정은 교수(한국불교미술사학회)의  견해도 확신할 근거가 없는 조심스런 추정이다. 또한 이명산 마애불상의 조성방식이 통일신라풍이라고 하면  더욱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황수영 박사도, 보고서의 말미에, 남해안의  점정(占定)위치의 숙제를 풀어 줄 욕진왜병(欲鎭倭兵)에서 보는, 고대사찰 창건사적의 연안배치가 갖는 공통적 특성, 석굴암과 같은 동향(東向)의 방향 일치성, 그리고 금성(경주)의 비보설화로 풀어 보는 조성인연 등에 관한 종합적인 고찰은 후대가 풀어야 할 과제라고 조심스레 언급하고 있다.

 

보안암석굴은, 석굴암과 같이 석불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고 횡혈식 석실고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석굴암과 닮은 꼴 만큼 보안암 만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사학의 주목을 받아 왔다.

그리고 석굴암과 같은 양식의 횡혈식 석실고분과 동일한 형태의 특성은 창건연대를 고려말에서 통일신라 초창기로 천년을 앞 당길 수 있다.그리고 보안암석굴은 배례대(拜禮臺)의 도깨비 양각과 16나한상의 배치등은 창건 연대를 밝힐 중요한 보물이다. 또한 동쪽으로 바라보는 부처에 대한 신앙양식은 신라의 내세신앙관과 태양숭배의 결합형태를 띄고 있고 지금은 소실된 산신각은 토속신앙과 불교를 결합한 신라의 불교사적 특성으로 보여 조성연대를 보다 앞당겨 보도록 유혹한다.

경남 산청의 금관가야 구형왕의 무덤.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한 마지막 가야왕으로 전해 온다. 상부에는 타원형의 봉분을 이루나 일반 봉토분과는 다른양식, 전7단 가운데 전면 4단째엔 작은 감실이 동쪽을 향해 마련되어 있으나 정확한 용도는 모른다 .조성방식이 보안암과 유사성이 깊어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 의미에서 경남 산청의 구형왕릉은, 조성기법과 조성연대를  보안암의 창건기와  비교해 볼 대목을 제시한다. 532년에 신라에 선양한 금관가야의 구형왕릉으로 알려진 석묘는 분묘의 특징이나 형태 면에서 보안암과의 유사점이 많다. 6세기 중엽에 조성된 왕릉과 100년이 넘지 않는, 시대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의 문화적 영향이 어떤 형태로던 파급되었을 것으로 본다. 

횡혈식 석실고분은, 널방벽(玄室壁, 主室壁)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가 시설된 분묘(墳墓) 형식으로서 측면에서 보면 터널식으로 되어 있어 '굴식돌방무덤'이라고도 한다.  고구려가 3세기 전후의 시기 이 묘제를 채용하여 제일 먼저 축조하기 시작하였으며, 4세기초부터 성행하였다. 5세기에 들어서 백제·가야·신라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충숙왕2년(1336년) 이곡이 쓴 사적기에 의하면 '문무왕조의 대사의명이 신문왕의 두 아들을  서봉사에 모시고 있었고, 두 왕자는 문무왕의 비가 용화세계에 나기를 빌기위해  서쪽에 석굴을 짓고 미륵석상을 조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又南隅天嶺上 作石龕而願生龍華 敬刻彌勒石像 ).

신문왕의 어머니인 자의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이었다. 문무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정명(후,신문왕)을 낳자 왕후가 되었고 문무왕이 죽기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무왕대의 외척인 파진찬 김선품가와 정명태자의 외척인 김흠돌가와의 투쟁은 문무대왕에서 신문왕으로 왕위가 계승될 무렵 김선품가의 승리로 끝나고 결국 진압당한 김흠돌은 목숨을 잃고 그의 딸인 신문왕의 태자비마져 폐위된다.

의명대사에게 맡겨진 두 왕자가 김흠돌의 딸인 태자비의 소생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서봉사의 사적기에는 할머니의 용화세계로의 천도를 위해 절에 들어 갔다하고 거듭 대왕대비가 사람을 보내 금성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니 더욱 깊은 절로 들어가 득도를 했다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편으로 신문왕의 두 아들을,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으로 추측하는 설도 있다. 보천은 통일신라의 안정기를 만든 효소왕이며 효명은 성덕왕으로 성덕대왕 신종으로 유명한  '에밀레종'의 전설이  만들어진 시기의 왕이기도 하다.

문무왕이 김유신의 둘째 누이인 문희와 김춘추(태종무열왕)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소생인점을 고려한다면, 신문왕의 두 왕자가 외가와  가까운 봉명산에서 수도함이 이상하지는 않다. 석굴암이 조성된 토함산의 동해구는 김춘추 이후의 왕가에는 의미 있는성지라면 금성의 비보산인 이곳, 지리산( 남악)은 김유신가의  고토(古土)로서 같은 무게의 의미를 가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신라 경덕왕 제위시절, 제상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는 석굴암. 석굴암은 동해의 문무대왕릉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동해구(東海口)로 상징되는 토함산 동편은, 문무왕의 수중왕릉인 대왕암과 감은사 등은  욕진왜병의 성지(聖地)인 까닭에,  문무왕은 김유신가의 피가 흐르며 가야와 신라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갖는 셈인데, 가야의 항복 이후 왜구의 침입이 어느때 보다 극심했고  섬진강역의 구 가야영역인 한다사(하동)영역은 이 곳을 통해 남해 내륙 깊숙한 곳에서 신라의 후방을 교란할 수 있는 백제 부흥세력과의 연합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그렇다면  사천만이 바라 보이는 봉명산에 욕진왜병의 일환으로, 불심으로 영토를 지키려는 전략적 선택도 가능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속전되어온 비보산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금성의 비보산인 이맹점에 용이 조화를 부려 금성의 백성들의 눈을 멀게했다는 설화가 비유적 표현으로서 가야유민에 의해 지배층이 된 왜의 집요한 반란을 화철석(무력)으로 진압하고 불심으로 욕진왜병하기 위해 호국사찰로서 서봉사를 중창하고 그 위에 석굴암을 조성하였다면 왕가의 안영을 빌고 불심으로 나라도 지키는 불국정토의 계책인 셈이다.

시민기자는, 우리지역의 사찰과 유적을 전문적으로  고증할 수는 없겠으나, 삼국시대에 가야가 갖는 지정학적 상관 관계 속에서 우리지역의 역사 이야기를 찾아 떠나보고자 한다. 두꺼운 역사의 나이테 속에 조각 조각 흩어져 있는 우리 향토 이야기를 날줄과 씨줄로 짜 맞추어  온전한 역사 스토리가 살아 있는 사천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보안석굴의 정확한 조성연대의 고증은 어디까지나 전문가의 몫이다.  다만, 지나침의 오류에서 확인은 받고 싶다. 역사의 유물은 이유없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연히 '석굴암과 닮은 모방 암자가 이곳에 존재한다'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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