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의 배우며 가르치며]

▲ 송창섭 시인

아름답고 우아한 한 여인이 눈을 가린 채, 한 손에는 무시무시한 칼劍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상’의 모습입니다. 그리스신화의 디케Dike, 로마신화의 유스티치아Justitia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이러한 여신상은 지역마다 나라마다 공통적으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칼이 없거나 눈을 뜨고 있거나 저울이 없는 여신상도 있습니다. 수수하고 소박하며 하얀 단색을 띤 것도 있고, 다양한 색상으로 치장하여 화려하며 또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역동적인 형상을 하고 있는 여신상도 있습니다.

여신상이 지닌 칼은 법의 권위와 권력이 엄격하고 강함을 나타냅니다. 저울은 양쪽 균형을 맞춰 법의 공정성과 형평성을 상징합니다. 눈을 가린 것은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을 차단하고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차림은 정의에 걸맞는 것으로 법과 법집행의 공명정대하고 단호한 의지의 표현인 셈이지요.
 
우리나라에는 대법원에 ‘정의의 여신상’이 있습니다. 서양 것과는 다르게 오른손에는 저울을 높이 들어 만민에게 평등함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왼손에는 큰 법전을 쥐고 담담히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차림새는 우리 고유의 전통 의상을 갖춰 단아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왼손에 법전을 소유한 까닭은, 법관으로서 법의 내용과 가치를 존중하며 모든 사안을 정의롭고 신뢰 있게 판결하겠다는 굳은 결의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헌법 제11조는 법치주의를 담고 있습니다.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라고 명기해 놓았습니다. 법 용어는 전문적인 개념어가 많아 읽고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 부분이 던지는 메시지만큼은 쉬이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인상무인人上無人 인하무인人下無人”이라고 했습니다. 차별불가론이요 만민평등사상 아니겠습니까.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해입니다. 정확히 30년 전의 일이지요. 올림픽 열기가 채 가시기 전 그해 10월 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이송하던 미결수 중 12명이 탈주합니다. 그들은 서울 시내 곳곳으로 도망가다 인질극을 벌인 끝에 경찰에 사살 당하거나 자살하여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른바 ‘지강헌 사건’이지요.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그가 당시 외쳤던 말입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한국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보도하면서 쓴 표현이지요. “Yujeon mujwai, mujeon yujwai.”

그런데 이 말이 지금도 거뜬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랍고 가위눌린 듯 가슴이 답답합니다. 아, 어쩌면 이렇게 표현하는 게 옳겠군요. ‘새삼스러울 거 하나 없어. 그게 뭐 어제 오늘의 일인가.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되풀이되고 있을텐데 말이야.’ 거대한 돌풍이 온몸을 뚫고 지나간 듯 자조적 체념이 무심결에 쏟아집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정의의 여신상’ 앞에서 국민들로 하여금 또 다시 속절없이 무너지게 만드는 황제들의 삶을 쫓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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