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의 영화이야기] <나를 찾아줘>

▲ '나를 찾아줘' 포스터.

소비주체와 생산주체의 간극은 가까운 듯 멀고, 적은 듯 크다. 현대 사회에서 때로는 생산자가 트렌드를 이끌기도 하지만 대체로 소비자의 니즈에 맞춰 소구력 있는 제품을 만든다. 대중예술이라는 영화산업도 다르지 않아서 생산자의 소비자에 대한 짝사랑으로 완성되기 마련이다. 이런 소비자-관객의 요구는 단 하나의 단어로 요약할 수 있으니 ‘재미’다. 문제는 이 재미라는 게 모호하기 짝이 없어서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웃음도 재미,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도 재미,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도 재미,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공포도 재미라고 포장을 한다. 

골이 빠개질 정도로 복잡한 재미 찾기에 생산자의 고민은 커져만 간다. 더구나 스릴러라는 장르라면 오죽할까. 진부한 클리셰는 피해야 하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문제를 배배 꼬았다가는 바보냐 소리 듣기 일쑤고, 개연성의 비중이 약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구멍투성이를 만들었다가 욕먹을까 걱정도 되고 말이다. 때로는 주인공이 멱살 잡고 하드캐리하기도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무조건적 재미와 흥행을 보장하진 않는다.

어린이 유괴를 소재로 다루는 <나를 찾아줘>는 영화적 측면에서 새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14년 만에 복귀한 배우 이영애의 캐릭터가 영화적 요소들과 변주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정도다. ‘모두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라는 메인카피 때문에 품었던 스릴러적 긴장감은 어디로 갔을까. 그저 지루함을 경계한 듯 힘을 준 사운드적 공포장치만 존재할 뿐이다.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스릴러 요소는 의식하지 못한 악(惡), 일상적 악에 대한 태도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상황보다 개인적 일상의 평화가 더 중요한 영화 속 사람들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오버랩되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웅변한다. 하지만 당연한 메시지도 영화적으로 잘 전달될 때 설득력이 있는데, <나를 찾아줘>는 메시지와 계몽과 영화적 욕심 그 어디쯤에서 서성이다 만다. 게다가 진부한 대사와 에피소드의 향연은 통쾌하면 넘어가겠지만 고구마 백 개는 먹은 듯한 답답함으로 소소한 재미마저 떨어뜨린다.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을 쓸 때의 모범사례로 들먹이면 딱 좋다. 배우 이영애의 복귀작이라는 무게감에 다들 어깨가 경직됐었나보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