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야화(野生野話)] 사천역사와 철길

기찻길 너머로 사천 화물역이 보인다. 지금은 뜸하게 들어오던 화물 기차도 발길이 끊겼다.
기찻길 너머로 사천 화물역이 보인다. 지금은 뜸하게 들어오던 화물 기차도 발길이 끊겼다.

[뉴스사천=최재길 시민기자] 흰 구름 유유히 흘러가는데 대지의 열기는 뜨겁기만 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진 지 한참이나 지난 사천역사(泗川驛舍)! 텅 빈 그 자리에 섰다. 여기 얼마나 많은 발걸음이 저마다의 사연을 새겨 두었을까? 어쭙잖은 숲 언저리 말매미들이 사라진 철마의 경적을 잇는다. 진삼선 열차는 사천, 삼천포 사람들에게 출퇴근과 낭만 사이에 있는 새로운 교통수단이었다. 때론 도시로 나가는 부푼 꿈과 고향으로 돌아오는 포근함의 오작교가 되었다. 

흰 구름
흰 구름

그 시절 열차는 편리하고 운임이 싸서 인기가 높았다. 사천역은 진주와 삼천포를 잇는 진삼선(晋三線)이 개통하기 전인 1953년에 사천선의 개통과 함께 들어섰다. 승객 열차가 1980년 적자운영으로 폐지되면서 사천역도 문을 닫았지만, 화물열차는 얼마 전까지도 운행되었다. 사천 비행장에 쓰는 기름을 운송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지금 남은 역사(驛舍)는 사천역이 문을 닫은 뒤 새로 생긴 화물 전용역인 셈이다. 역사 한편에 왜소하게 자란 잣나무에 잣이 커다랗게 매달렸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잣인 만큼 실한 열매를 맺지는 못할 테다. 한 세월 주목받던 교통수단, 사천역사와 철길은 이제 쓸쓸한 뒷모습으로 남아있다.

고삼
고삼

철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건너 풀밭에 고삼이 무성하게 자라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고삼은 도둑놈의지팽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오래전 야산 풀밭에서 튼튼하고 긴 줄기를 뻗고 있는 모양을 보고 그리 불렀단다. 하필 도둑놈일까 싶기도 하지만 익살스러운 이름에 재미가 묻어난다. 하얗게 피어난 쉬나무 꽃에 암끝검은표범나비 한 마리가 끈질기게 앉아서 꿀을 빤다. 

쉬나무꽃과 나비
쉬나무꽃과 나비

흔한 잡초 닭의장풀 꽃잎이 나비처럼 오똑 솟아나 쪽빛으로 빛난다. 쪽빛나비풀이라는 또 다른 이름처럼 아름다운 앙상블을 이룬 한 마리 나비다. 이 작은 나비는 깜찍 발랄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 수술은 모두 6개인데 각자 역할이 다르다. 꽃밥을 달고 생식에 관여하는 길쭉한 수술 두 개. 나머지 짧은 수술은 노란 리본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곤충의 눈길을 끄는 역할을 한다. 이 작은 꽃 한 송이도 생존 전략이 있구나! 잡초라고 함부로 볼 일은 아니겠지? 

닭의장풀
닭의장풀

철길 옆에는 키가 큰 미국자리공 꽃이 진 자리에 푸른 열매가 매달리고 있다. 미국자리공은 한때 유해식물로 오명을 떨쳤다. 하지만 대기오염으로 황폐해진 터에 자리 잡고 살면서 생태계를 되돌리는 역할을 한단다. 2m나 되는 키로 무리를 이루어 빈터를 덮으니 땅심을 높이고, 새빨갛게 익는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된단다. 

미국자리공열매
미국자리공열매

철길 주변에 달맞이꽃, 개망초, 미국자리공 등 귀화(歸化)식물이 많이 보인다. 모두 빈터를 노리는 잡초 식물들이다. 낯선 땅에 들어와 토종풀이 이미 자리를 잡은 곳에선 살아남기 어렵다. 우리도 사할린이나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한 역사가 있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로 일을 나간 역사가 있다. 두렵고 낯선 땅에 들어가 맨몸으로 뿌리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귀화식물이 맨 처음 자리 잡는 곳은 공항이나 항만, 고속도로와 철길 주변이다. 이런 곳은 물류가 이동하는 관문 역할을 한다. 귀화식물의 씨앗은 해외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신발이나, 옷에 묻어 들어오기도 하고, 수많은 물류를 따라 들어오기도 한다. 옥수수, 콩 같은 곡물이나 가축의 배 속에 숨어들어오기도 한다. 심지어 원예작물로 이용하기 위해 들여오기도 하지. 귀화식물의 밀입국에는 한계가 없구나! 인류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이제는 귀화식물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세계는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길을 여는 잡초의 세계는 노마드(Nomad, 유목민)를 연상시킨다. 21세기를 ‘새로운 유목민의 시대’라고도 한다. 자유롭게 이동하며 첨단 디지털 장비를 이용하여 창조적인 삶을 사는 신인류. 파격적인 변화와 대혼란의 시대가 달려오고 있다. 철길의 아련한 꿈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끈질기고 지혜로운 잡초처럼!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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