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시월의 그런 아픔이 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가을은 그윽한 자태에 아름다운 인품을 지닌 시간이었습니다. 농사꾼이 뿌린 들녘의 모종들이 햇살을 먹고 자라면서 이룬 누런 풍요로움을 우두커니 바라봅니다. 농사꾼의 짓무른 손끝과 발끝의 저린 내음이 일궈 낸 곡식들은 오롯이 생生의 절정입니다. 길손의 텅 빈 마음을 가득 채워 주고 다독이는 눈물겨운 선물입니다. 사람과 자연이 손잡고 빚은 땀방울은 또 다른 샘의 원천입니다. 그 원천을 가슴에 안으면, 비로소 막막하고 우울했던 삶의 편린들이 앙금처럼 가라앉고 들숨과 날숨을 균형지게 잡아줍니다. 그렇게 가을은 농사꾼의 설법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월의 그런 아픔이 오기 전까지는, 가을 나무숲은 마냥 신비로웠습니다. 흙을 걷고 바위를 지납니다. 산천초목을 손아귀에 쥐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색채를 빚어, 황칠하듯 마구 뿌려대는 단풍의 현란한 춤사위에 넋을 빼앗깁니다. 얼간이가 따로 없습니다. 제 자리에 선 채 온몸이 굳어 버립니다. 고스란히 고체석상固體石像! 다진 돌이 되어 신생아처럼 변신합니다. 기암절벽의 탄생도 이와 같을 거란 생각이 스칩니다. 숲속에 몸을 담그면 들리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옹알이는 숲 밖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맛을 끌어냅니다. 겉과 속의 다름이 매혹적으로 연출하는 부조화, 불일치의 다양성이었습니다.  

시월의 그런 아픔이 오기 전까지는, 가을 하늘은 연푸른 바탕에 순백색의 구름이 자유로이 떠다녔습니다. 주위 것들을 온통 가을 하늘로 도배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카페 2층을 찾아 편히 앉습니다. 마시는 차는 시를 읊듯 입안에서 감미롭습니다. 때를 감지한 디제이라면 프란시스 레이의 영화 음악 ‘빌리티스’를 배경으로 깔면 좋겠습니다. ‘분위기 살리네, 무드 쥑이네’ 이런 말이 나온다면 그날은 잊지 않고 싶은 날들 중 하루가 될 겁니다. 잔잔하면서도 머리를 까딱일 정도로 조금은 경쾌한 ‘부베의 연인’ 주제곡도 괜찮겠다 생각했습니다.    

시월의 그런 아픔이 오기 전까지는, 이따금 낙엽을 바라보며 시를 주절댔습니다. 가을을 보내고 맞이한 겨울 이야기입니다. 울라브 하우게의 시 「한겨울, 눈」 전문입니다. “한겨울, 눈 / 새에게 빵을 나눠 준다 / 조용하니 잠이 깨지 않는다” 혹한에도 굶주림에 떨고 있는 생명을 염려하는 마음이 어찌나 따스한지 한겨울의 눈을 물리치고도 남습니다. 서로 나누고 함께하려는 마음이 살아 있습니다. 이를 자비라고 말하기보다 그냥 ‘착함’, ‘거룩함’이라고 쓰겠습니다. 

시월의 그런 아픔이 오기 전까지는, 무턱대고 살아왔구나 싶었습니다. 폭동이라도 일으켰다면 나을까 차라리 전시 작전 중이었다면 위안이 될까, 온갖 생사의 그림을 그립니다. 멀쩡한 도시 한복판에서 백쉰아홉의 귀한 생명이 사라지다니, 현실이 무너진다 한들 이토록 허망할 수가 있을까요. 1년이 흐른 지금 달라진 것 하나 없이 모든 현상은 여전히 먹먹합니다. 유가족들의 희망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정부의 자성과 변화를 촉구합니다. 뇌리를 떠나지 않는 한 희생자 어머니의 말씀입니다. 

“가을이 아픕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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