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사천=조평자 사진작가] 옥상에서 이불을 툭툭 털어 빨랫줄에 널면서 무심코 내려다본 옆집, 옛날의 동양오락실 자리. 오랫동안 비어있는 낡은 조립식 건물 뒷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써 놓은 글씨들을 보았다. 하트를 두 개나 그린 것을 보니 흐릿한 글씨는 사귀고 있던 남자와 여자의 이름이었겠지. ‘알라븅’이라고 쓴 것은 사랑의 고백이었겠다. 무엇에 대한 분노였는지 불안이었는지 불만이었는지 ‘지랄’이라는 글자도 있고 다른 심한 욕설도 보였다.

언제 써 놓았던 것일까.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붉게 새기면서 표현하려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트를 그린 아이들은 왜 바보처럼 마음 안에 자라게 된 사랑을 이렇게 꺼내 보이고 싶었을까. 어떤 일들이 이 아이들을 오락실 뒤로 숨어들게 했을까.

카메라 필름으로 찍어 온 손님들의 사진을 뽑아주던 때의 일이다. 미국 유타주에서 한국으로 온 선교사가 매주 월요일이면 사진을 인화해 갔다. 작은 바닷가 마을 곳곳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인상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어느 날 선구동 중앙시장 공중화장실 뒷골목에 쓰인 스프레이 글씨를 찍어 왔다. ‘소변금지’라고 쓴 글 아래 커다란 가위를 그려 놓은 것이었다. 사진을 보면서 ‘오 마이 갓’이라고 말할 때 나는 웃고 있었지만 곤혹스러웠다.

스프레이로 쓰는 글씨는 대체로 짧고 강렬하다. 가시가 있다.

허름한 양철 대문에서 읽는 ‘개조심’. 머리띠를 두른 사람들의 집회 현장에서 만나는 분노의 글씨 ‘결사반대!’. 어떤 글씨는 부도난 아파트 벽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노임 주라! 개XX!’라고 울부짖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 갈등은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이런 절박한 심정과 마주치면 읽는 사람도 순간적으로 가시에 찔린 듯 통증이 번진다. 붉은 스프레이로 분사된 불편한 감정과 사랑의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지만 어떻게든 겪어낸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번짐이 있어서 울분이 옅어지기도 하고 녹슬기도 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폐업한 오락실 구석을 지키기도 한다.

낙서는 자유롭다. 스프레이로 쓴 글씨는 구호처럼 짧고 정직하고 분명하다.

옛날의 동양오락실 뒷벽, 낙서 한바닥을 하늘수박이 푸른 잎사귀로 에워싸고 있다. 담벼락 위로 느릿느릿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간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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