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섭의 배우며 깨달으며]

송창섭 시인.
송창섭 시인.

[뉴스사천=송창섭 시인] 겨울이 겨울다운 맛은 알싸한 추위에 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깨를 움츠리고 콧김을 훌훌 내뿜는 모습. 손이 시리고 이가 시리고 귀가 시립니다. ‘시리다’는 차가운 기운이 닿아서 춥고 아리다는 말입니다. 추위가 혹독하면 살이 시리고 뼈까지 시리다며 몸서리칩니다. 겨울을 나는 동안 참참이 기온이 오르고 날이 풀릴 때가 있습니다. 인간이 안도감을 갖고 평정심을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겨울 숲을 가로지릅니다. 누군가는 겨울 숲은 황량해서 싫다고 말합니다. 꽃은 없고 나뭇잎마저 다 잃은 텅 빈 세상, 벌거벗은 나뭇가지와 삭정이들만 초췌하게 서 있는 시무룩하고 무뚝뚝한 공간, 에는 바람 불어 기댈 곳 없고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세계라고 겨울 숲을 몰아붙입니다. 겨울 숲 풍경을 빈한하며 풍요롭지 않다는 시선으로 치부합니다. 근거를 들고는 있지만 포괄성을 잃은 편견이 아쉬움을 줍니다. 

겨울 숲의 생태 구조는 표면적으로는 황량함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내적으로도 풍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하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숲은 소리 없이 부활을 잉태하고 새로운 부화孵化를 꿈꾼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무의 황량함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거저 얻은 것을 거저 돌려주는 섭리입니다. 본래의 헐벗음으로 되돌아가는 의식입니다. 숲에서 헐벗음이란 원초적인 가난과 없음(無)을 뜻합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최소한의 풍요는 욕망의 포기에서 시작합니다. 독일 경제학자 에른스트 F 슈마허는 이것을 ‘자발적 가난’이라 주장했습니다.  

나무의 원형 회귀는 생명체의 거룩한 의식입니다.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황량함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편견의 온상에 갇힌 꼴입니다. 이러한 의식의 싹은 인간이 지닌 집착이라는 특성에서 비롯합니다. 부富에 관한 집착과 권력에 관한 집착이 대표적인 행태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거스르는 집착은 막강한 경제력과 무력의 논리에 기반을 둡니다. 한 번 손에 쥔 것은 놓지 않으려는 강박적 습성은 자신의 오판을 절대시하고 자신을 아집의 노예로 전락시킵니다. 

울라브 하우게의 시 「그들이 법을 만든다」 전문입니다. “그들이 국회에 앉아 있다 / 플라톤도 읽지 않은 그들이.”

플라톤은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인식론 등 서양 철학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입니다. 하우게의 시는 플라톤의 철학 이념인 이데아에 대한 이해 없이, 법을 만들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범죄 행위요 터무니없는 불성설不成說임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행한 난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번민하지 않는 정치 활동은 국민의 행복을 음해하고 경멸하는 개짓거리입니다. 정치 세력이 철저한 이기주의 패거리로 몰락하는 이유가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고요하고 적막한 겨울 숲에 들어서면 머리를 어지럽혔던 많은 상념들이 침잠합니다. 근심, 고뇌가 사라지면서 몸과 마음이 자연의 한 조각으로 스며듭니다. 숲속을 거닐며 꽉 쥐었던 ‘나’라는 존재마저 풀어 흩으면, 마침내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가난한 자에 이릅니다. 이를 가리켜 ‘홀가분함의 경지’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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