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산악회 3년째 장애인과 동행.. ‘마음과 마음 잘 어우러져’

지난 17일,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지리산 노고단의 가을 속으로 떠났다. 삼천포산악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아름다운 산행'이었다.
강원도 높은 산엔 가을단풍이 8부 능선, 7부 능선까지 내려왔다는 소식이 귓가를 간질이던 지난 휴일(17일), 삼천포산악회원과 사천시장애인복지관 이용자들이 지리산 성삼재를 찾았다. 삼천포산악회(회장 김종섭)와 사천시장애인복지관이 함께 마련한 ‘아름다운 산행’을 위해서다.

‘아름다운 산행’은 사천네트워크의 주선으로 시작해 올해로 3년째 맞았다. 그동안 다솔사를 품은 봉명산을 두 차례 함께 올랐던 이들은, 올해 그 목표를 다소 높게 잡았다.

노고단. 전남 구례군에 있는 지리산의 한 봉우리다. 정상은 해발 1507미터이지만 해발 1400여 미터이상의 너른 고원지대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이 노고단에서 지리산의 최고봉 천왕봉까지를 일컬어 지리산 종주길이라 부른다.

본격적인 노고단 산행에 앞서 삼천포산악회원들이 자신의 짝에게 손수건을 목에 묶어주는 모습.
앞에서는 끌고, 뒤에서는 밀고... 노고단 산행, 출발!
성삼재휴게소에서 이 노고단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일부 구간은 돌계단으로 이뤄진 등산로가 있지만, 굳이 이 길을 피한다면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비포장길을 따라 산책 하듯이 걸을 수 있다.

문제는 그 거리가 4킬로미터에 달한다는 것. 아무리 차가 다닌다 해도 산길은 산길이다. 그 길을 휠체어를 끌고 밀거나, 어깨를 부축해 올라가야 하는 것이 이날의 목표였다. 물론 장애가 있다 해도 혼자 힘으로 걸어갈 사람이 더 많았다.

산행에 나선 사람은 산악회원 20여 명과 장애인 20여 명, 그리고 장애인복지관 직원과 사천네트워크 관계자 등 60여 명이었다. 출발 직전, 이날 산행의 등반대장을 맡은 삼천포산악회 한국진 사무국장이 당부의 말을 남겼다.

“아무 걱정 말고 따라 오세요. 저희만 믿으면 어느 순간 정상까지 가 있을 겁니다.”

아름다운 산행에 나선 사람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60명 정도였다. 완만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일행들이 걷고 있다.
휠체어를 밀고 끄는 모습.
산행에 필요한 요령이나 갖가지 주의사항이 아닌 오직 ‘믿음’ 하나만 얘기한 셈이다. ‘과연 할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 노고단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할 즈음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두 명이 맨 앞에 섰다. 휠체어에 끈을 매달아 앞에선 끌고, 뒤에선 미는 형국이었다. 경사는 급하지 않았지만 자갈길이 그리 녹록치는 않아 보였다. 10여 미터 간격으로 패인 작은 물길을 만날 때마다 휠체어를 눕히듯 지나야 했다.

휠체어를 끌고 미는 사람도 힘이 들겠지만 그 안에 앉은 사람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산악회원들의 힘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뜻에서 직접 바퀴를 굴리려 애쓰는 모습도 보였지만 행여 다칠세라 산악회원들로부터 저지당했다.

장애인복지관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저 정도면 타고 있는 사람도 끄는 사람 못지않게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이는 그들의 표정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때론 고통스러운 듯 보이는 그들의 표정은 한 마디로 ‘복잡했다’.

휠체어가 빗물이 지나는 길을 힘겹게 지나고 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도 힘이 들긴 마찬가지다.
화사한 웃음이 가을 단풍과 잘 어울린다.
휠체어를 타고 산행한 사람은 2명. 내병변1급과 지체1급 장애를 가진 서권실(29), 하상포(38) 씨였다.

반면 불편한 몸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노고단을 끝까지 오른 이도 있었다. 지체4급으로 한쪽 다리에 의족을 착용한 윤성란(50) 씨는 시각장애1급으로 앞으로 못 보는 김남곤 씨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이 사람은 앞을 못 보니까 내가 도움이 될 테고, 나도 이 사람 손을 잡고 걸으니 무게 중심 잡기가 훨씬 좋아요.”

윤 씨의 말이다. 그야 말로 서로에게 눈이 되어주고 다리가 되어 준 셈이다.

이런 가운데 윤 씨와 김 씨가 주고받는 대화가 더 걸작이다. 윤 씨가 곱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고 “와~ 단풍이 예쁘네!” 하자 김 씨는 “거기 단풍이 어딨소? 나무 이파리뿐이건만”하고 맞받았다. 일행들이 동시에 ‘깔깔깔’ 웃음꽃을 터뜨렸다.

가운데 손을 잡고 걷는 두 사람이 윤성란 씨와 김남곤 씨다. 서로 의지하며 걷는 모습이 보기에 멋졌다.
김지훈 군과 김구희 씨가 손을 꽉 잡고 걷고 있다.
노고단 산행이 만들어준 짝꿍은 이뿐 아니었다. 출발에서부터 하산까지,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고선 손을 놓지 않은 두 사람이 있었으니, 김지훈(18) 군과 김구희(29) 씨다.

엄마와 함께 산행에 동참했다는 김 군은 삼천포중앙고 2학년생이다. 다운증후군으로 1급 지적장애가 있는 김구희 씨의 손을 절대 놓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제대로 따랐다. 김 군은 “별 생각 없이 산행에 따라 나섰는데, 내가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니 기쁘다”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밖에도 장이화(지체2급) 씨 등 걷기가 불편한 장애인과 삼천포산악회원들이 한 몸이 되어 목적지를 향한 도전은 계속됐다. 성삼재를 떠나 ‘걷다 쉬다’를 반복한 끝에 1시간40분 만에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했다. 보통의 산악인들은 40~50분 걸린다지만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런 시간”이라며 모두들 서로 축하하고 격려했다.

노고단 단풍은 별로 볼품이 없었다. 채 물이 들기도 전에 시든 모습이었다. 대신 안개속으로 지리산 능선이 은은하게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지체장애2급의 석민 씨가 정상을 조금 앞둔 노고단대피소에서 산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석민 씨를 태운 구급차량 모습.
그러고는 점심시간. 산악회원과 자원봉사자가 지고 나른 60명 분량의 도시락이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다시 노고단을 향해 몸을 추슬러야 할 시간. 그러나 도저히 더 걷기가 어렵다는 친구가 나왔다. 지체장애2급의 석민 씨. 지난해 봉명산 산행에서 가파른 길을 끝까지 잘 올랐던 그가 이번에는 일찍 지치고 말았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성삼재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량이 올라와 석 씨를 싣고 내려갔다. 구급차량은 개원을 준비하고 있는 중앙병원에서 제공했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 고갯마루까지 질러가면 10분 거리다. 하지만 ‘아름다운 산행’ 일행들은 비교적 평탄한 길로 빙 돌아갔다. 그리고 30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 같이 탄성을 질렀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해냈다는 기쁨이 더 컸으리라. 먼저 도착해 있던 일반 등산객들은 손뼉으로 일행을 격려했다.

노고단 고갯마루를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일행들. 일반 등산객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격려하고 있다.
내병변1급의 서권실 씨와 지체1급의 하상포 씨가 최종 목적지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노고단 정상이 저만치 보였지만 당초 계획했던 산행은 여기까지였다. 남은 구간은 길이 조금 가파르기도 하고 좁아서, 일반 등산객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산악회원과 장애인들은 서로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산을 내려갔다.

돌아보면 이번 산행은 정말 아름다운 산행이었다. 산행을 이끌어 준 삼천포산악회의 공로 말고도, 어느 단체는 도시락을, 어느 개인은 간식을, 또 어떤 이는 일회용 비옷을 챙겨주기도 했다. 아름다운 산행은, 모든 이의 마음과 마음이 잘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산행 참가자들이 노고단 고갯마루 돌탑 앞에 모였다.

노고단 정상은 저만치 있었지만 마지막 욕심은 접었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